【종그니칼럼】역사로 본 한국과 베트남
【종그니칼럼】판단
나는 부산에 있을 때 제주도를 가봤으니까 어언 30년이 넘는다. 그런데 베트남 여행은 10년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나의 동남아시아 여행은 베트남과 필리핀이 전부다. 베트남은 우리 노회 소속 선교사님의 초대를 받아서 다녀왔었다. 나는 베트남에 대한 애정이 있다. 베트남의 역사가 우여곡절이 많아 꼭 내 나라와 같은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한국을 대한민국 또는 한국이란 공식 이름이 있는 데도 대국답지 않게 '녹두국'이라 비하 해서 부르듯, 이렇게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중국 대륙에 한반도는 볼따구니처럼 붙어있다. 동남아시아 대부분이 섬나라를 제외하고 중국대륙에 붙어있다. 한반도 역시 중국대륙에 연결되어 있는 아주 작은 국토라지만 나는 내 나라 이 조국강토가 한없이 좋다.
작은 나라라지만 며칠전 나는 강원도 영월을 차를 타고 하루 온 종일 부지런히 다녔어도 영월 땅을 밟아 본 곳 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았다. 이 나이 되도록 우리나라 땅 전체는 고사하고 지극히 일부만 스치고 지났을 뿐이다. 가깝고도 먼 일본은 갈 기회는 더러 있었지만 그 땅을 밟기 싫어 아직도 내겐 미지의 땅이다. 지금의 베트남을 내가 20대였을 때도 베트남이라고도 했지만, 내 귀엔 월남 월맹이 더 귀에 익어 있다. 당시 미국에 의한 베트남과의 소모 전쟁 때에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군이 월남을 돕기 위하여 이렇다할 명분도 없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때 우리는 최빈국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때라 이 명분없는 미국의 용병으로 뛰어 들어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치렀다. 미국과의 전쟁 당시만해도 베트남인들은 키가 무척 왜소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6학년생~중학생 정도였는데 베트남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지금은 젊은 세대들의 신장(키) 또한 우리 한국 젊은이들과 별차이가 없게 되었다.
아무튼 이 말도 안되는 이 황당한 국제 전쟁을 오늘의 베트남을 세운 국부 호치민의 구국의 일념으로 똘똘뭉친 베트공인민군과의 명분도 실리도 없는 끝도 한도 없는 이 소모전쟁에 마침내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함과 동시에 베트남은 마침내 통일국가로 발돋움하여 대망의 호치민 인민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어찌보면 이 말도 안되는 한국군 참전의 명분을 떠나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두가지 실리를 얻었다. 첫째는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천금같은 실전의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두번째는 파병된 군인들이 미국으로부터 매월 급여로 받은 달러가 국내의 외화수입으로 적립되면서 천금같은 이 외화가 대물림 된 가난의 틀에서 벗어날수 있는 국가 중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에게 씻을수 없는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베트남 참전용사들 대부분이 워남전쟁의 후유증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베트남의 역사에대한 인식이 대단히 빈약하다. 하지만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또는 지정학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반도의 설움을 무수히 받았고 또 끊임없이 밀려오는 서양의 자본중상주의 제국들로 부터 무수한 침략과 간섭을 받았지만 미침내 그들은 미국을 물리침과 동시에 이념적으로도 명실공히 사회민주주의 통일국가를 세움으로 '건국의 아버지'라 일컷는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에 의해 마침내 사회민주주의 건국의 기틀을 놓음으로 지금 베트남은 눈부신 비약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수많은 구국의 호기들을 모두 놓쳐버리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일제 식민지 때에 조선민족의 얼을 말살시키려 했던 엄혹했던 그 시절을 반면교사로 민족이 하나 됨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진정한 조국 광복을 이루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이 나라 최일선에 서 있던자들의 민족역사의 막중한 책무였음에도 이들은 이땅의 민초만도 못한 민족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의 무능 때문에 시대의 이 부름 앞에 부응하지 못했다. 엉뚱하게 좌우 이념에 빠져 민족으로부터 민족 대통일의 역사적 사명을 망각한채 서푼어치도 못되는 좌우 이념으로 천금같은 나날들을 서로 쌈박질만 일삼다가 마침내는 민족상잔의 비극까지 자초하고 말았다.
"아! 이러다가 다시 나라를 잃겠구나" 하고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노심초사했었던가! 그 우려가 현실로 다가와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라는 세계대전 버금가는 민족 상잔의 비극을 치러야 했다. 이 비극은 내 나이 팔순이 다 된 오늘까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벌써 80성상 동안을 남과 북 같은 민족끼리 총뿌리를 겨누고 대치국면에 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집권자나 나랏 일을 하고있는 정치인들은 오로지 타성에 젖어 현시점에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과연 얼마만큼이나 실감하고 있을까? 4년마다 혹은 5년마다 선거를 치르고 있지만 선거를 치르면 뭐하나? 근본이 바뀌어야 되는데 백년하청이니 모두 도찌니 개찌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이다.
우리는 베트남과 잠시 악연이 있었지만, 그리고 베트남은 수정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은 수많은 외침으로 외유내강의 내공이 아주 단단해서 주의(主義) 내지 이념(理念)을 떠나서 자국의 유익을 위한 실용사회주의 정책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이것이 건국의 아버지라 일컷는 호치민의 실용주의 국가관이다. 그래서 베트남인들은 이념 노선에 있어 국가와 인민의 권익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고 분단의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습득하여 나날이 선진화의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은 아세안 한류의 원류가 되어 왔었다. 그래서 베트남은 이제 “한류의 시작은 베트남 이다.”라는 평을 실감한다. 그뿐아니라 베트남은 리틀 한국이라 할 만큼 모든 선진화 과정이 한국을 쏙 닮았다.
예를 들어 2003년 9월 주 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의 한우창 홍보관은 ‘베트남의 한류 현상’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당시 베트남에서 선풍적이었던 한류 현상에 대한 소개와 그 원인을 분석했다.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베트남 거주 한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베트남이야 말로 한류(韓流)의 원류라고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트남에서 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 열풍'을 중국 언론이 사용하면서, ‘외국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열광적인 선호 현상’을 나타내는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류가 시작되었다는 중국언론의 주장에 대해 당시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에서 한류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훨씬 이전부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문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찍부터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친근감을 느꼈고, 지정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로 동질감을 느껴왔다. 당시 베트남 거주 한국인들은 베트남에서 한국 문화와 상품의 인기는 수백 년 전 조선시대에서 부터 찾는다.
16세기 말 중국의 명(明)· 청(靑)시절 북경에서 만난 조선과 베트남 사신들이 필담(筆談)으로 나눈 이야기들이 자못 흥미롭다. 같은 한자 문화권의 조선과 베트남 사신들이 필담으로 피차간 세상돌아가는 얘기며 당시의 정담(政談) 과 한시(漢詩)를 서로 주고 받으며 친분을 돈독히 하였다. 특히 조선 실학파 의 선구자 중 한사람인 이수광은 1597년 명나라 사신으로 베이징을 다녀오면서 베트남 사신과 나눈 대화와 시문(詩文)을 엮어 쓴 "안남국 사신 창과 문답록"을 통해 베트남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수광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극찬받는 "지봉유설"에서 베트남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남기기도 했다. 베이징에서 이수광과 친분을 쌓은 베트남 사신 '풍극관'(풍칵꽈안·Phung Khac Khoan)은 당대 베트남에서 추앙받는 위대한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그런 인물이 베트남 사신으로 베이징을 갔다가 거기서 실학파 이수광을 만나 그의 시(詩)를 베트남에 소개하니 베트남 상류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베트남을 3번이나 다녀온 '조완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완벽이 베트남에 당도하니 베트남 관료들이 이수광의 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라며 조완벽을 환대했다고 전한다. 이 당시 베트남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수광이 조선의 ‘한류 스타’였던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 상품으로 ‘고려인삼’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미 1500년 전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에 인삼을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개경이 인삼재배단지로 유명하여 우리나라 인삼을 고려인삼이라 이름한 것이 상호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당시 국제무역도시였던 '벽란도'를 통해 중동으로까지 인삼을 수출하였다.
또 다른 논문인 ‘19세기초 베트남에서의 고려인삼’이라는 어느 논문에서는 사신단에 의해 북경으로 간 인삼이 베트남으로 유입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있다. 중국 황제에게서 받은 고려인삼과 중국에서 밀무역을 통해 베트남에 유입된 고려인삼은 베트남 황제가 공신들에게 주는 특별 하사품으로 쓰였다고 한다. 1760년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강장환'이 일기체 형식으로 작성한 '북원록'에는 베트남 사신이 선물을 보내며 고려인삼을 간절히 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정도로 베트남에서 고려인삼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한다. 뉴욕대학교 인류학과 이혜민 박사의 ‘루이 14세와 고려인삼’이라는 논문에서는 1686년 프랑스를 방문한 시암(태국)의 사절단이 루이 14세에게 고려인삼을 선물했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인삼이 재배되지 않으니 중국을 통해 한국의 고려인삼이 들어와 프랑스까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지역에서 고려인삼을 꾸준히 수집했고 동인도회사를 이용해 대량으로 매입했다고 전해진다. 근대에 들어서는 1910년대부터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고려인삼 무역을 하는 한국인들이 수십여명 있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54명의 한국인이 베트남에 거주하는데 베트남 북부 하이퐁에서 인삼 무역으로 거부가 된 한국 교민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에서 한류 상품 고려인삼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한국 교민들이 대거 철수한 것도 잠시, 1980년대 말 베트남에 개혁· 개방 정책이 시행되고 1990년대 들어 한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한국 드라마도 베트남에서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한국문화원은 한국 문화 보급 차원에서 한국 드라마 저작권을 사들여 베트남 방송국에 무상으로 공급했다고 한다. 한국 기업들도 무상 또는 매우 낮은 가격으로 드라마를 공급했는데 그 대가로 드라마 방영 시작과 끝에 자사 광고를 따내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1996년 HTV(호찌민 TV)에서 한국드라마로는 최초로 '금잔화'가 방영되면서 한국 드라마 인기몰이가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2002년 이한우 서강대 교수의 "베트남에서의 '한류' 그 형성과정과 사회경제적 효과"라는 논문에 따르면 1997년 '느낌', 1998년 '내 사랑 유미' '의가형제' '아들과 딸'이 인기리에 방영됐다. 다음 해 연이어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별은 내 가슴에' 등이 방영됐는데 베트남에서 방영된 한국드라마는 1999년 45편, 2000년 60편에 달했다. 베트남 TV를 틀 때마다 매일 여러 편의 한국 드라마가 나올 정도였다. 2000년에 들어서는 베이비 복스, NRG, 젝스키스 등 한국 대중 가수들의 노래가 베트남 젊은 층에 폭발적 인기였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한국 가수처럼 머리를 염색하고 화장하는 젊은 층과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한국에서 인기 있는 가수들과 노래는 베트남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최고의 절정은 2023년 7월 예매사이트가 문을 열자마자 매진을 기록한 블랙핑크의 하노이 공연이었다. 이 정도면 한류는 베트남에서 먼저 시작됐다고 말하는 한국 교민들의 말이 허투로하는 말이 아니다. 아세안 대부분 지역에서 70~80% 시장점유를 하는 일본 자동차들의 등쌀에 한국 자동차 시장 점유율이 3~5%에 불과하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만 유일하게 현대차·기아가 35%를 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류 덕분에 한국 제품이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류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류 열풍이 한국 상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게 할 수는 있지만, 한류와 한국제품과는 결이 다른 얘기이기 때문이다. 또 한류 열풍을 문화 식민지 건설로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일제식민지와 같은 아주 전근대적인 사고(思考)다. 이처럼 한 시대를 리더하며 모든 명예를 다 얻는다 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격을 잃게되면 티끌같은 인생에 불과 할 뿐이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종그니칼럼】판단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판단할 때, 자칫 자기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다가,오해나 일을 그르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선입관'이라는게 아주 무서운거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때에, 어떤 막연한 주관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아주 편협한 타성에 길들여져 있을때가 많다. 우리가 환경에 만감한 육신을 지녔기 때문에,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대상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만은 버려야 한다. 나 또한 내가 아는 지인들, 혹은 내 주변의 사물이나 주어진 여건들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혹여 이를 예단하지는 않는지 자성할 때가 많다.지난 날 내가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세상 물정을 전혀 몰라, 상대방의 거짓말 장단에, 곧이 곧대로 믿을만큼 순진했던 나는, 그들의 봉이었고 먹잇깜 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두팔 두다리와 목이 몸통에 붙어 있는 것이, 참 대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다.
언제쯤이면 상대방의 마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읽을 줄 알고, 그리고 훈훈하고 넉넉한 맘으로, 세상을 윈윈하며 살아갈수 있을까? 기만이나 속임이란 것이 애시당초 없는 사회, 그런 사회는 우리의 이상향 속에서나 있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애시당초 그런 이상향을 만들어 낼수 있는 마음 그릇이 없는 걸까? 내가 몸담고 있는 '행복이 가득한 집 요양원'에 계시는 아흔 한분의 어르신 중 한분이 코로나 오미크론으로 입원 3일만에 소천하셨다. 유족들은 이 사실을 우리 요양원에 알리지 않고, 장례를 치르고 난후에야 이를 알려왔다. 우리가 혹여 가슴아파할 것같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근자에 보기드문 가족의 사려깊은 배려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유족들의 정말 따뜻한 배려에,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하고 큰 위로가 된다. 아흔 한분의 어르신들은 같은 요양원에 계신 것 말고는, 저마다 얼굴이 다르듯 성정도 천태만상이다. 몸이 비교적 건강하면 치매가 있다든지, 의사소통이 된다 싶으면 몸이 불편한다든지, 사회에서든 요양원에서든 삶의 균형이 참 기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어느 대학병원 외과 의사가 응급수술을 위한 긴급전화를 받고, 병원에 급히 들어와 수술복으로 갈아 입고 수술실로 향하고 있었다. 의사는 병원 복도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막 수술받아야 할 한 소년의 아버지가, 의사를 보자마자 환자의 아버지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환자가 지금 경각을 다투고 있는데, 전갈을 받고도 병원 오는데 하루가 걸리나요? 당신은 내 아들의 생명이 얼마나 위급한지 모르나요? 병자를 치료해야 할 의사로서 최소한의 책임의식도 없나요?" 의사는 지극히 미안한 맘으로 보호자의 손을 잡고 달랬다. "죄송합니다. 제가 외부에 있어서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왔는데 보호자의 마음을 애태우게 했네요. 바로 수술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조금만 진정해 주십시요, 아버님." "진정하라고요? 만약 당신의 아들이, 지금 여기서 대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면 진정할 수 있겠오? 내 아들이 죽으면 당신이 책임질거요?" 보호자의 피말리는 심정을 십분 이해한 의사는,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분명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아주 편하게 말하는구만"
그리고 몇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의사는 밝은 표정으로 나와서,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간호사에게 물어보세요."하며 소년의 아버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의사는 밖으로 달려 갔다. "저 의사는 왜 저렇게 오만한 거요? 내 아들의 상태를 묻는 동안 잠시 만이라도 내가 안심할수 있도록 기다려 줄 수는 없는 건지, 나 원 참..." 그러자 수술실에서 막 나오고 있는 간호사에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자 간호사는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의사 선생님의 중 3학생 이던 외아들이, 어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례식 도중에 수술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오신 겁니다. 아드님의 목숨을 살리시고 장례를 마무리 하러 가신 겁니다."
간호사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수술환자 아버지의 입장이 어땠을까요?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상대방을 내 입장에서 판단하거나 단정지을 때가 너무 많다. 여러분은 혹여 '역지사지'라는 말을 아십니까? 우리가 남을 판단할때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거지요. 우리의 입은 하나인데 이 하나의 입가지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호흡하기도 하고, 말로써 상대방의 인격을 살리기도하고 모함하기도한다. 이처럼 분명 입은 하나인데, 이 한 입가지고 입의 쓰임새가 참 다양해서, 그용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것, 바로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 된다.
"입안의 혀처럼."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혀는 이빨과 함께 한 입안에 있지만, 이빨은 거친 음식을 꼭꼭 씹어서 소화가 잘 되도록 하고, 혀는 음식을 먹는 일을 돕기도 하고 입안을 자유자재로 굴리면서 입안의 침샘을 자극해서 먹은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 이처럼 음식을 먹는 데에도, 입안의 혀와 이빨은 한 입안에 있지만, 그 맡은 역할이 아주 다름에도 자기가 맡은 소임을 서로 한치의 오차도없이 잘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의 역할이 이렇게 다르니, 우리의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쉽게 판단하지 말자. 삶의 모든 이치가 다 그러니까.
지난 날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지금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니까요. 주관적인 선입관이 아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예단 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소원해진 관계를 할수만 있으면 사랑으로 품는, 사랑을 담아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일 대선 투표를 앞두고 오늘도 나는, 대통령 후보자들의 말 잔치에 귀 기울여 들어본다. 그자가 그자라지만, 싫든 밉든 둘중 하나는 택해야 한다니 말이다. 그래도 정치를 전혀 모르는 자의 우중정치보다는 정치를 알고 경제의 흐름을 읽을줄 아는자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이재명'을 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