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사도신경을 원형으로 복원해야

‘사도신경,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주도홍 독일어 번역)

2023-12-08     주도홍 박사
   주도홍 박사(전 백석대신대원장, 총신대 초빙교수, 총신대 74학번)

우리의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갔다“가 빠졌는데, 이는 잘못으로 원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 의해 어찌 예수께서 음부, 지옥에 가셨다는 말인가라며, 삭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 츠빙글리, 칼빈도 고백했던 신앙고백 ‘사도신경’에는 엄연히 이 부분이 들어있다. 이에 대한 신앙고백이 뜻하는 바를 유르겐 몰트만을 통해 들으며, 한국교회가 역사적 형태 사도신경을 다시 가져와 온전히 신앙으로 고백하길 제안한다. 한 마디로 음부, 지옥의 권세까지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는 일이 어찌 문제일 것인지!

몰트만이 사도신경의 이 부분을 해석하는 바를 곧 출판될 ‘사도신경,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주도홍 독어 번역)에서 부분적으로 가져온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예수가 ‘음부로 내려갔다’라고, 믿고 고백할 때, 크리스천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과연 이에 관한 해답은 있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답을 확고히 붙든다면 어떨까? 그것이 의미하는 최소한의 역사적 데이터를 우리는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359년 시루미움(Sirmium) 공회가 이 부분을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시리아의 신학자 마가(Markus von Arethusa)가 그것을 제안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실제로 죽었다. 그는 고난을 겪었으며, 십자가에 달렸고, 무덤에 묻혔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버린 바를 통해 절대적 고통과 더불어 실제로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경험했다. 그리스도의 음부로의 하강은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최하점이다. 그것은 사자(死者)들의 신비한 나라를 통한 그리스도의 영혼 이동이 아니다. 그는 “고난을 겪으며 - 십자가에 달렸고 - 묻혔다”라는 말은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죄과, 고통, 죽음의 지옥으로 그리스도가 들어갔으며 그것을 벗어났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이 본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 신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신적인 것은, 그가 모든 악마의 나라를 통과한 후 우리의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을 향한 우리 믿음의 첫 번째 의미다.

그렇지만, 이를 서방 교회는 얼마 되지 않아 곧 다르게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을 마땅히 이해해야 하는데, 사자(死者)의 나라를 통한 구원자의 개선 행진, 승리 가득한 지옥 정복, 이전 이뤄진 아담과 하와의 옛 언약의 포로 된 의인들의 구원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음부로의 하강을 그의 천국행의 출발로 이해했다. 그와 더불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만물의 주가 되었다. 그의 구원하는 능력으로부터 아무것도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사망과 음부도 절대 장애가 아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이미 “전에 불순종하여 옥에 있는 영들에 영으로 가서 선포하셨고”(벧전 3:19-20),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본인의 생애에서 죽음을 극복하셨는데, 그는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어, ”저주가 영원 영원히” 없다. 또한, 죽은 자들, 살해된 자들 그리고 독가스로 죽임을 당한 자들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인지는 여전히 하나의 열린 물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의 십자가 고난의 진수로서 그리스도의 음부 이동, 모든 이의 구원을 향한 부활의 출발점으로 그리스도의 승천이라는 두 개념은 기독교적 신앙의 역사를 관통한다. 루터와 칼빈은 아레투사의 마가(Markus von Arethusa)처럼 재차 이 두 개념을 십자가로부터 이해했다. 그렇지만 17세기 루터 신학은 부활로부터 이를 이해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십자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함이냐 아니면 지옥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미하는지를 묻는데, 사실은 진리가 이 양 개념 안에 함께 있다. 이는 우리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벌어진 예수의 실제 죽음을 직시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내쫓김을 당한 죽음을 죽었다. 자기가 속한 백성들로부터 하나님 율법의 이름으로 선고를 받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 버림받은 자로서 죽었다. 예수는 로마인에게 넘겨졌으며,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였다.

이 죽음에서 특별한 것이 무엇일까? 아피아 길에서(via Appia) 자유를 위해 일어난 노예의 스파르타 봉기 때문에 7천 명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다. 우선 예수의 죽음에서 특별함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누가 이 길을 떠났으며, 어려움을 당했는지를 인식할 때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했고, 하나님의 나라와 아주 근접하여 살았다. 하나님은 사람들 가까이 함께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처럼 죄를 용서했고, 하나님처럼 가난한 자, 매춘부, 세리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 하나님처럼 율법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들과 가까이 교제하였다.

이 사람이 범죄자의 죽음을 죽을 때, 그래서 그의 죽음에는 다른 이의 죽음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왔음을 기쁨으로 선포했었던 그 하나님에게서 내쫓긴 경험인데, 하나님이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음을 명확히 자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내쫓음을 받은 경험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 가까이에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지옥의 고통이다. 하나님의 아버지 집에 거하던 자가 버림을 받은 일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시험을 받은 자와 최고로 버림을 받은 자 예수라는 그 지점에서 크리스천은 항상 위로를 발견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을 소유했으면서도 사망과 지옥을 경험했다. 이것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역시 이해했는데, 카뮈는 하나님 예수를 향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에게 공감을 그리고 고난 당한 자 예수에게 형제애 안에서 공감을 가졌다.

이제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의 승리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이 버림받은 자 중 가장 심하게 버림받은 자를 죽음에서 일으키고, 음부에서 벗어나게 하였다는 믿음을 전제할 때다. 하나님은 본인의 친밀함과 해방하는 능력을 예수에게 나타내 보였는데, 예수는 모든 저주받은 자와 함께 하나같이 있는 그대로 지옥의 고통을 겪었다. 그런 후 이 비참한 곳에서 다른 모든 이를 위해 지옥의 한복판에서 “평화와 기쁨이 미소 짓는” 하나님 나라가 나타났다.

그런 후 음부는 예수에게서 중단되고 극복되었다. 음부는 더는 끝없는 소스라침이 아니며, 모든 소스라침의 끝, 바로 그 곳으로의 새로운 출발이다. 음부의 고통은 더는 영원히 없다. 음부의 고통은 역시 최후가 아닌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 가시를 대적하여 이렇게 소리친다.

“사망은 승리 가운데 삼킨 바 되었다. 음부야, 네가 쏘는 그 가시가 어디 있느냐?”

음부는 열려있기에, 자유롭게 통과해 빠져나갈 수 있다. 단지 예수가 경험한 그 음부뿐 아니라,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부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그의 밝은 미래를 열었듯이, 그렇게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죽음의 전장, 살인의 현장, 일상 가운데 경험하는 작은 지옥까지를 뛰어넘어 여명의 밝은 빛이 이른 아침 동터온다.

우리가 음부로 내려갔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몹시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지옥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고통당하는 자들과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다. 재단 위에 놓인 두 촛불 사이에서 아니라, 예루살렘성 앞 폐허로 쫓김을 당한 예수는 두 사형수 사이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예수는 버림받은 자, 외로운 자, 고문당한 자, 무고히 살해 된 자, 죄 때문에 증오받는 자들의 형제가 되었다. 예수는 그 어떤 다른 이의 곁이 아니라, 바로 그들 곁에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옥 불안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절대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를 떠나, 버림받은 자들의 곁에 현존한다. 억눌림을 당한 자, 고문을 당한 자, 그러는 동안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그 자리에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그러한 연약한 자신만을 바라보지 말고, 지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비명에 기죽지 말고, 당신의 그러한 지옥을 극복한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음부에 갔고, 그 음부가 예수께 갔는데, 그것을 그리스도가 음부로 갔다고 한다. 우리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지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과 함께, 음부에 계신 하나님은 사람을 기꺼이 통과하게 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사망을 통해, 세상을 통해, 죄를 통해, 위기를 통해 찢김을 당하였다. 그는 음부를 통해 찢어져서, 말하길 나는 항상 그의 친구다(Paul Gerhard). 확실한 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아우슈비츠의 지옥’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났던 순교자들과도 함께 살고 있다.”(J. Moltmann)

                                주도홍 박사, 총신대학교 초빙교수, 백석대학교 전 부총장

【특집】흑사병에 임하는 종교개혁자 루터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를 기근, 흑사병, 전쟁에서 구하소서! '

▶ 공적 사명, 영적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 주간신문 3호에 게재

16세기를 사는 독일인의 기도였다. 그들은 늘 죽음과 함께 살아야 했다. 죽음 속에서 삶을, 삶 속에서 죽음을 잊지 않아야 했다. 루터의 삶은 역시 죽음이 늘 곁에 있었고, 그의 찬송 "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이러한 상황에서 불러야 했던 찬송이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사악한 영이 공기나 종기를 통해 사람의 몸에 독을 쏘아 흑사병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불신, 불순종, 감사치 않음을 내놓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은혜를 베푸소서! 기도해야 한다. 당시 교회는 이 기회를 회개와 갱신의 때로 여겨 무릎을 꿇었다. 무엇보다 더욱 담대하고 두려워말고, 마귀를 물리쳐야 하는데, 악한 영이, 사람들이 전염병을 두려워하고, 벌벌 떨며 무서워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패닉에 빠지면, 좋아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강한 믿음으로 도리어 그 악한 영이 소스라쳐 놀라 도망치게 해야 한다.

루터는 흑사병을 피해 피난하지 않고, 심지어 환자를 집에 들여 치료하며, 심방하며 영적 위로자의 사명을 다했다. 루터의 품에서 비텐베르크 시장의 아내가 운명하기도 했다.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흑사병에 걸려 죽어가야 했던 수도 없이 많은 자들의 장례식을 치뤘다. 그렇지만 루터는 하나님이 진정한 치료자임을 확신하며, 무서운 사망의 흑사병에 떨지 않았다. 특히 사명자들이 목사든지, 공무원이든지,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삯군이 되지 말고,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루터는 공적 예방 소독을 강조했다. 당시는 훈연소독을 말하는데, 집안에 연기를 펴서 공기에 있는 바이러스를 죽이고 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필요로 할 때 그의 곁에서 도울 것을 강조했다. 환자를 방치하는 것은 살인죄를 범해, 주님의 심판에서 살인자가 될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약을 나눠주고, 그 약을 먹이라고 말한다. 그 약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그렇다. 병든 자와 오염된 지역을 나눠 멀리하라고 하며, 각별한 예방을 강조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주님이 진정한 치유자가 되시며, 또한 자신이 병들었을 때에, 참 치료자되시며, 의사로서 우리를 낫게 하신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었기에, 사려깊게 합리적으로 생각할 것을 강조했다.

루터는 흑사병을 즈음하여 두 가지 죄를 언급한다. 수동적 왼편 죄와 능동적 오른편 죄이다. 외편 죄는 전염병에 걸린 자를 무서워하고 방치하여 죽게 하는 죄이다. 오른 편 죄는 흑사병을 하나님의 저주로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여 역시 치료도 약도 주지도 먹지도 않고 받아들임으로 죽게 하거나 죽는 죄이다. 그럴 경우 환자가 조심하지 않아 남에게 전염시키는 결과가 오는데, 큰 잘못이라고 경고한다.

흑사병에 임하는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 공적 사명, 영적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루터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흑사병에 대처했다. 다르게는 교회 내 문제뿐 아니라, 대 사회적 책무를 할 수 있는대로 다하는 루터의 모습이다. 그 책무의 반경에는 한계가 없다. 할 수 있는대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교회 안과 밖에서 다한다. 아니 루터에게는 이런 구별이 없고, 어떻게 흑사병을 물리쳐야 할 것인가에만 마음을 다한다.

루터는 요한 3:16을 가져와 흑사병에 임하는 바른 주의 종의 모습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죄인을 살려내는 주님의 모습이 그 원리로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