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산다는 것

【종그니칼럼】마음의 창을 열자!

2023-10-06     리폼드 투데이

 '평상심'이란 내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요동하지 않는 자세다.  설사 폭풍이 휘몰아쳐 산천초목이 다 요동을 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마음 자세다. 태풍으로 장대비가 쏟아져 온 마을에 홍수가 범람을 해도 거산(巨山) 처럼 중심을 잃지 않고 이 위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다.  이러한 자세가 예측이 어려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는 가정과 사회 전체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예측불능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줄지어 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일상화 되다시피 하고 있음에도, 초아적이고 본질적인 대처보다는 너무  피상적으로 대처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지금 전무후무한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뿐인 지구마저 인간들의 무분별한 훼손으로 회생불능의 중병을 앓고 있다. 이를 아시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는 말씀으로 창조한 창조의 세계에 살면서 창조질서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다가 회생불능의 대재앙을 격고 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내면이 근본부터 병들어 가고 있음에도 타성에 젖어 여전히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다가 결국 인류의 끝자락에까지 오고 말았다.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대중을 향한 무차별 흉기 난동사건과 존비속 살상 사건들 그리고 대자연의 재앙이 곳곳에서 무시로 일어 나고 있다.  이 병적인 현상들을 한결같이 범법자로 규정 짓고 "법의 잣대로만 대처하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처방인가? 인간의 본질에서 멀리 어긋나 있는 심령을 새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담당할만한 이가 없다. 민주주의의 요체 즉 '안틸로기아'란 다수결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의 중지를 모아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도출해 내는데 있다.  예를 들어 지난 육이오 동란 전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북에 가정을 두고 이남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일반 서민들에게 의술을 베푼 장기려박사는, 헐벗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예를 들어 당시 입에 풀칠도 못해 병든이가 찾아 오면, 그는 처방으로 소고기를 싸서 주며 "먹지 못해 생긴 병이니 몸 보신부터 하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사회와 사람을 살리는 삶이다.

이처럼 몸안의 병을 치유하는 근본은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데 있듯, 정치도 '치유하는 정치' 라야 한다.  그런데 병든 사회를 치유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하고 있다.   이는 '안틸로기아' 즉 국민들의 중지를 모으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대한민국 일원으로 태어났지만 그러나 성장 과정은 천차 만별이다.   내가 300평도 채 못되는 뒷 터밭에 심은 각종 채소도 똑 같은 밭에 심겨졌지만, 잘 자라는 채소도 있고 자람이 무척 더딘 채소도 있다.   밭에 심겨진 채소도 이처럼 천차만별 이듯이 같은 시대에 똑같은 대한민국에 태어났어도, 부모의 위상에 따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의 역량과 주어진 달란트에 따라 천차만별의 갈림 길에 서게 된다. 이처럼 금수저와 흑수저의 현대판 신분의 틀 속에서 소외된 많은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의 단추를 바꾸면 우리 앞에 전개 되는 시야가 얼마든지 달라질수 있다.   대입시와 대기업 입사 등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자괴감과 높아져만 가는 사회 진출의 옹벽을 깨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력에 달렸다. 조선시대  양사언의 시가 생각난다. "태산이 높다하도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옛말에 "호랑이에 물려가도 살아 날 기회가 있다."고 했다. 이의 모멘트가 바로 긍정의 사고(思考)다.  시도해 보라 하면 된다!

끈끈했던 혈연중심의 가족제도와 자급자족의 시대에는 느림보 거북이도 살수 있었지만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경쟁사회에서는, 오로지 육안에 보이는 것만을 쫓는 경제 우선의 개인주의가 팽만해 있는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내게 주어진 여건에 오로지 적응하느냐  의 여부로 판가름 난다.  그에 앞서 젊은이는 부모의 우산에 기대려 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자신의 적응능력을 길러라!   천재와 보통은 백짓장 한장의 두께도 못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 남을수 있는 자립정신을 키우는 일이다.  먼저 내면의 나를 세파에 던져 어떠한 상황에서도 헤쳐나갈수 있는 독립심을 키워나가는 일이다.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나를 나되게 키워 나가라!  옛말에 "소년 이로(小年 易老) 학난 성(學難 成)"이라 하였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황금기다. 물질위에 세워진 현대문명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의 부요 즉 나의 나됨을 키우는 일이다  내힘으로 모은 것이 아닌 것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힘으로 내면의 부요를 길러라!

오늘 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알아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면 인류사회가  내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워 질까? 중국 시황제 버금가는 권력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이나 러시아의 푸틴을 보시라!  권력의 중심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한낱 권력의 하수인들 일 따름이다.   조선시대 때 어느 왕이 세자 빈을 간택할 때에 두 처자에게 묻기를 "너희는 군왕을 무엇이라 여기느냐?"고  묻자, 한 처자가 "군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오며 그 성은이 하해와 같아옵니다."   왕은 다른 처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더니, "왕은 한냥에 비할수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한냥은 배고픈 백성에게 온 식구의 주린 배를 채울수 있는 지극히 친근한 돈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답인가?  근자에 이르러 물질앞에서 가정 폭력과 존비속 살인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물질문명이 만들어 낸 천박한 황금만능 주의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이 마치 하루살이처럼 내일 일을 예측할수 없는 지극히 불안한 사회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기때문이다. 

먼저,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욱 더 엄격해져야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귀찮아도 많이 걷고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노년의 외로움은 공통의 숙제이므로 노후의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같은 년배끼리 사귀는 것은  늙은이라는 동질감이 있어 늙은이를 가장 이해할수 있다.

다음은,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말자. 예를 들어 "괜찮다"라고 사양하면 젊은 세대는 그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돈이 진짜 내돈이다. 돈은 저장가치만 있는게 아니고 주고 받는 교환가치 나눔의 가치가 있다.

셋째, 고독을 즐길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친구도 점점 줄어든다.  아무도 날 찾는이 없어도 고독에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으니 말씀속에 마음을 담가 보시라!   

넷째,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돈이면 다"라는 생각은 세상을 너무 황량하게 만든다.  그래서 늙으면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늙었다해서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해 보라. 그리고 몸가짐을 언제나 단정히 하시라.   건강이 약화되면 자세가 흐트러지 싶상이다. 늙으면 건강이 보배다.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다. 

다섯째,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죽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리고 노환은 잘 낫지 않는다.  병을 친구로 삼자  약 달포전에 입소한 할머니가 그동안 매일같이, '집에 가야 한다'며 떼를 썼는데 마음이 안정되자, "오늘 아들이 모시러 온다."고 했더니 "아들 집에서 딱 하룻 밤만 자고 오겠다."하고 가셨다.  바로 이것이 지혜다.  주어진 여건을 친구로 혹은 전환의 기회로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자다.

【종그니칼럼】마음의 창을 열자!

내가 몸담고 있는 요양원에서는, 지난해 12월 년말부터 년초까지 5일 동안, 세분이 코로나와 상관 없이 유명을 달리하셨다. 이렇게 돌아가시면, 곧 이어 대기하고 있던 분이 입소하시고, 이러기를 무의탁 양로원 시절부터 수십년 동안 반복하면서 살고 있다. 이처럼 요양원엔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 서 계신분들이 줄을 서 있다. 그런데 난 이젠 이 일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마다 마냥 생경스럽다. 우리가 살면서 이웃들의 죽음을 수없이 보며 살아왔으면서도, 혹여 그 죽음을 나와는 무관하게 여겨왔었기 때문은 아닐까?  새들중에 '자고새'라는 새가 있는데, 이 새는 밤만 되면 돌아 갈 둥지가 없으니까, "이 밤이 새고 나면 집을 지으리라." 작심을 하고도, 날이 새면 까맣게 잊어버리니까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것은 비단 '자고새'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지 싶다.

어느 목회자가 쓴 글을 보니, 체코라는 나라에서는 소위 '해골 교회'라 불리는 독특한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곳엔 무려 6만구의 해골뼈로 교회 내부를 장식했다고 하는데, 상상이 안간다.  성당 안에 장식된 그많은  유골들을 어떻게 수집했을까?  14세기 전후 요즘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듯, 흑사병의 창궐과 맞물려, 끊임없는 전쟁으로 죽은 자들이라고 한다. 그럴지라도 해골과 뼈로 성당 안을 치장한 이유가 뭘까?  "죽음을 잊지 말자" 는 경고의 멧세지란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라고 하는데, 죽음은 인류의 숙제로 먼 옛날이나 문명한 지금이나,숙명적인 것이다. 마치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듯,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듯, 인생도 이와같이 생성의 날이 있고, 소멸의 날이 있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리라. 생로병사를 거쳐 본래의 자리로 돌아 가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연회자리에서도, 미이라가 된 시체를 수레에 실고 들어온다고 한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순간에도, 불청객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죽음에 대한 관념은 마찬가지여서, 공동묘지를 마을 중앙에 두고, 뗄레야 뗄수 없는 하나의 일상으로 여기도록 했단다.죽음을 피할 것으로 만 보지 말고, 유의하여야 할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기억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지금을 더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존중하며 성실하게 살게 될 것이다. 죽음이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고 피할수 있는 것도, 연장하거나 단축할수 있는 것도 아닌 일회자의 삶이므로, 오직 맞겨진 삶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오늘은 한 살 더 먹은지 닷새째 되는 날이다.  죽는 것이 싫다고 죽음을 피할 수가 있을까요?  영겁속으로 돌아간 2021년을 되돌릴 수 없듯이, 내 앞에 다가 온 2022년을 후회없이 살 수 있도록 하여야 겠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incarnation) 우리에게 오셨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대 사건이기에 인류사는 그의 탄생을 중심으로 주전과 주후로 획을 긋고 있다. 

말씀이 육화되어 어디로 강림하셨는가? 그 어린 주 예수를 모실 방이 없어, 말 구유에 누우셨다. 구원과 사랑과 소망을 잃어버린 인생들에게, 이를 회복시켜주시고자 오신 아기 예수를, 맞이 할 마음의 방이 없어 구유에 누우셨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심령안에 있어야 할, 겸손과 긍휼과 사랑의 방은 세속의 것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우리의 외연을 가장 크게 넓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우리 몸 안과 밖이 얼마나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차 있는가!

지금 우리는, 싫든 좋든 대통령선거 열풍에 휘둘리고 있다. 주워 담을만한 말들보다, 공허한 말 잔치로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나라는 물질적으로 이 보다 더 잘 살 이유가 없다. 내가 살아 보니, 하루 양식 한되박이면 되고, 옷 열 벌이면 평생 입을수 있다. 집 또한 방 한칸이면 널널하다. 더 나아져야 될 것은 경제가 아니라, 마음의 부요다. 지금 이 나라엔 모두 다 경제적 부요만 부르짖다 보니, 마음들이 모두 핍절되어 있어 동시대를 사는 이웃들에게 마음의 창이 닫혀 있다.

중국 당(唐)나라때의 전설적인 인물 한산자
(寒山子)는, 천태산(天台山) 한암(寒岩)굴속에서 유유자적 대자연을 노래하며, 수많은 詩를 남겼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왔겠는가! "세거환수년(歲去換愁年) 해가 바뀌면서 시름도 몰고 갔네. 춘래물색선(春來物色鮮) 봄 기운이 깃드니 만물의 빛갈도 고와라!
산화소록수(山花笑綠水) 산에 핀 꽃은 푸른 물 보며 웃고, 암수무청연(巖樹舞靑煙) 바위 위의 나무는 푸르른 연무속에 춤을 춘다. 봉접자운락(蜂蝶自云樂) 벌과 나비는 마냥 즐겁다 춤추고, 금어갱가린(禽魚更可憐) 새와 물고기는 마냥 어여뻐 보이네. 붕유정미이(朋遊情未已) 대 자연을 벗삼아 노는 정 다함이 아쉬어, 철효불능면(徹曉不能眠) 밤을 지새우며 잠들 줄 모르네!"

2022년 임인년 온 인류를 태운 지구가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9억 4천 9백 50만 Km 거리를, 시속 10만 7160Km. 초속 29.79km 속도로,처음 출발한 자리에 지금 우리는 서 있다. 이처럼 자연의 흐름을 따라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는, 인간의 셈법으로 나이를 헤아리지만, 육신의 유한한 지식으로 고정관념을 뛰어 넘지 못해, 영원한 삶으로 승화할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절반의 절반도 못 미치는 삶을 살고서, 지금 타고 있는 이승의 수레를 떠나, 갈림의 수레로 갈아 타려는 것은 아닌지?  신년 새해 아침, 마음의 창을 크게 뜨고, 어떻게 하면, 이 유한한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 참 자유하는 몸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