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신뢰도 19%, 교회괴사증후군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집단 현대판 니골라당, 이세벨, 유태회, 발람 증세들로 존폐위기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계속 낮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 1월 5일부터 10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약 75%로, 격차는 세 배 이상 벌어졌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위로를 건네던 모습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졌고,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됐다는 분석이다.
목회자 개인에 대한 신뢰도 역시 낮았다.
목회자의 말과 행동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약 21%,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약 73%에 달했다. 기독교인 내부에서도 3명 중 1명인 33.3%는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불신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공공의 이익보다 교회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였다.
한국교회 신뢰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과제
'윤리·도덕 실천 강화'가 58.6%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단순한 봉사 확대보다 도덕성과 공공성의 회복이 우선돼야 한다는 요구다. 사회가 교회에 가장 기대하는 역할 역시 '윤리'였다. 현재 교회가 기여하는 영역으로는 '정신적 위로'와 '복지 활동'이 주로 꼽혔는데 앞으로 '사회윤리적 가치 형성'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요구가 높았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로교단인 예장합동 교단 또한 양적으로 하향세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질적인 하향세를 염려해야 하는 시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코로나19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양적,질적 하양세를 지적하고, 회개와 대책을 외쳐왔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면 나타나는현상이라고 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괴사 증후군"이다.
한국교회의 교회괴사 증후군은 이 네 가지 치명적인 암적 요소들을 수술하여 잘라내지 못한 데에서 왔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이 네 가지 암적 요소가 발생한 까닭도 투명하게 밝혔다.
①니골라당의 말씀(성경) 폐기나 왜곡해석을 버려라.
(계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은 성경을 인간 ‘이성(理性)의 재판정’에 끌고 나와 피고석에 앉혀 놓은 자들이다. 그들은 신앙의 핵심에서 아가페 신앙 곧 ‘십자가 지는 삶’을 절대명령이 아닌 ‘부가가치’ 정도로 치부하는 성경해석을 한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종교 이기주의적 야망이나 타산을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감 변조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성이 원래 피조물로서의 한계에 갇혀있어서, 창조주를 판단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지적(知的) 오만에 빠져 있는 까닭이다.
"성경 읽을 시간도 없는데 무슨 선거규정을 읽어보란 말이냐?"고 말했다는 보도는 나골라당 증후군이다. "헌법이고 규칙이고 그게 뭔 상관이야? 나한테는 적용하면 안되지!"라는 태도는 성경이나 헌법 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전형적인 니골당이다.
②이세벨의 기복주의와 번영주의와 샤머니즘을 버려라.
(계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양심의 기준에서 예수의 아가페 윤리실천을 옆으로 밀쳐놓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신 율법주의자’ 또는 '행위구원론자'로 정죄하며,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오히려 바르게 사는 이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그만큼 이기적 번영(성공주의)과 이익 극대화(물질주의)의 탐욕에 편집(偏執)되어 있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탐욕을 위해 하나님을 ‘거래대상’으로 보는 우상숭배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적 양적 번영을 신앙의 척도로 삼고,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샤머니즘)’에 탐익되어, 자기최면으로 스스로를 ‘초자연적 권능’이나 ‘번영하는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로 꾸미기까지 한다.
그들은 성령이나 천국이나 성경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자산가치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이 탐욕이 가져오는 샤머니즘적 잡령들을 ‘진리의 영’과 분별하지 못하고 성령으로 받아들인다. 예수께서는 이를 영적 음행이라고 판시(判示)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 음행의 더러운 실체를, 그 영적 음란의 침상(寢牀)을 뒤엎어서라도 드러나게 하겠다 하셨다. 한 마디로 말해 귀신에 사로잡힌 실상은 정신병리적 증상인데, 바로 그 증상을 숨기지 못하고 모조리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즉 그런 자들은 반드시 정신병리적 증세를 감추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아가페 윤리의식 혐오’가 핵심적인 문제이다. 아가페 혐오증은 양심이 선택할 대상에서 ‘선과 사랑(아가페)의 영역’은 사라지게 만들었다. 오로지 ‘이기적 영역’만 남아, 양심은 그 선택기제(選擇機制) 자체의 기형화를 이루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양심이 아니고, 뱀이 말한 양심 즉 화인 맞은 양심이다.
③유태회의 ‘보수적 경건 지배주의’와 ‘진보적 지성(知性)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라.
(계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태인(유태회)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유태회(사탄의 회당)는 고의로 그 이성과 양심을 하나님께 대단히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미는 자들이다. 그 무리들은 완전히 ‘종교적 엘리트주의’에 묶여 있다. 그들은 종교의전과 제도와 기구를 신성화ㆍ성물화(聖物化) 하면서, 자신의 권위의 의상(衣裳)으로 삼아, 자신의 거룩을 가장(假裝)하여 돋보이게 하는 짓을 즐긴다. 이를 위해 교회의 법과 행정제도나 정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과 자기의 소속집단을 ‘정통ㆍ보수ㆍ주류’로 만들어 교권 장악에 혈안이 된다.
하나님과 성경도 자신의 경건함과 선함을 드러내는 도구요, 자신의 위광(威光)을 실현하는 교권적 권위와 권력 창출의 근거로 인용한다. 심지어 ‘회개의 연극’ 조차 철저하게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겉보기로는 그들나름의 정직ㆍ성실ㆍ정의ㆍ법준수가 있지만, 그 모두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의 정당한 근거로 내세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여러 신학적 주장을 편의대로 뒤섞어, 자신의 신비를 조작한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겸손을 가장한 눈을 내려뜨고, 독사의 눈으로 상대방이 자신을 높여주는지 않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교회와 교계 또는 사회에서 자기 개인이나 소속집단의 소유와 명예와 지배력에 충성하는 자이다.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처럼 자기최면을 걸면서까지 자기 개인이나 소속집단의 위광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그들은 늘 남을 재판하는 자리에 서는데, 그 판결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윤리’가 아니고, ‘내 편이냐, 네 편이냐’가 기준이다. 그러므로 헌법이나 규칙이나 선거규정은 다른 후보들에겐나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옳고 그름’을 책임있게 판별하는 일에서는 떠나고, ‘나 또는 내 소속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선’으로 인정하고, 손해가 되는 것은 ‘악’으로 판결하는 ‘사이비 선악윤리 기준’을 내놓는다. 그들은 교권의 자리를 가지고 개인적 집단적 경쟁과 다툼이 처절하다. 이는 자신의 지배이익을 위해서는 목적도 수단도 얼마든지 변개시키는 자세이다. 그들은 명백하게 ‘종교 마키아벨리즘’에 사로잡힌 자들이요, ‘종교괴물’로 변화한 자들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나 교단에서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돈과 명예를 위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모든 것은 그들간의 이해와 타협과 거래의 대상이 된다. 결국 교단은 교권주의자들 간의 이해관계로 아수라장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자신들에게 진리의 소리를 외치는 자가 생기면, , 그를 ‘공동의 적’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달려든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소리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신들의 악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적인 교권(敎權)을 활용하여 이단 논쟁을 일으키며, 진리의 목소리들을 함께 공격을 한다.
예수께서는 이 타락의 원인 역시 ‘아가페 불감증’이라고 지적하신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혼란을 일으키는 악을 잘 가려냈다고 칭찬하신다. 또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구제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다고 칭찬하신다. 이것은 그 이성과 양심 부분에서는 큰 잘못이 없었음을 인정해 주신 것이다.
④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종교상업주의를 거부하라.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니골라당, 이세벨, 유태회, 이 모든 악을 합쳐서 종교 마키아벨리즘을 즐기는 지능적인 범죄의 무리들이다. 소위 교권정치를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심지어 이단의 무리에 속한 자였던 자에게 매수되어 ‘정통파’의 상표를 붙여준다. 발람은 철저한 종교상업주의자로서, 그의 부패한 이성은 니골라당이요, 화인 맞은 양심은 이세벨이요, 그 괴물스러운 의지는 유태회이다. 발람은 사람에 따라 이 가운데 한 두 가지로 그 타락이 출발하지만, 결국 세 가지가 합쳐지게 되고, 종국에는 종교 마키아벨리스트가 되고 만다. 네가지 중에 단 한 가지만 잘못된 채, 회개하지 않아도,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대상이 된다. 하물며 종교 마키아벨리즘에 젖은 자가 목회자가 된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이런 종교상인(발람)이 목회자나 당회원으로 들어선 교회는 부패한 종교그룹이 함께 백화점 코너처럼 각기 구획된 방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런 교회는 여러 신을 섬기는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을 꼭 닮아 있다. 거기에 발람은 ‘악세서리’ 처럼 반드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끼어놓고, 필요에 따라 그 소수세력을 봐주는 척하며 이용하다가 갈아치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올바른 이들이 교회의 코어그룹이 되거나 ‘권위집단’으로 자라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나 노회(총회)에서는 각 파벌끼리의 종교 이기주의적 충돌이 살벌하다. 그러나 발람의 특징은 그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발람은 이 갈등 속에서 적절한 충성경쟁과 계급적 질서와 돈과 각종 특혜와 단호한 치리로 중앙집권적 치외법권 지대를 만들 기회로 활용한다. 거기에 화려한 종교의전(宗敎儀典)을 입혀주어, ‘신비의 성역(聖域)’을 제도화 함으로써, 거래와 타협과 경쟁과 견제와 격려가 적절하게 작용하는 ‘작은 바티칸’과 같은 ‘신성 교회정치 체제’를 만든다.
이로써, 예배와 기도와 성찬과 성경은 이 신성 교회정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적 가치’로 취급당한다. 작은 교황 같은 개인이나 그룹은 ‘대리 하나님’ 같은 절대적 존재가 된다. 그런 자들에게는 교회의 성도들이나 기능이나 자산(資産)을 모두 자신의 명예와 지배를 위한 소유자산으로 여기게 된다. 거대 재벌교회를 만들어, 그것을 사유화하여, 자식에게 대를 이어 물려주는 행태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아가페(무조건적 사랑)를 거부하는 의지와 정의에 대한 불감증에 감염된 ‘이기적 탐욕 편집증’ 환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돈-명예-권력-정욕에 대한 편집증세에 사로잡힌 비정상적 인격(영성)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죄악의 근원은 ‘첫사랑의 감동’을 상실한 점이라고 지적하신다. 에베소 교회는 왜 이런 지적을 받아야 한 것일까? 이 문제는 사도 요한 스스로도 심각하게 고뇌하며, 자기 가슴을 치며 회개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 내용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요, 그 회개에 따른 새로운 역사의식의 지평이 열려 계시받은 내용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래서 밧모섬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의 사도 요한의 행적은 요한복음과 서신의 기록, 그리고 계시록의 올바른 해석, 나아가 계시록 2장과 3장에 수록된 아시아 일곱교회에 대한 개혁운동이었다.
이미 유럽교회들에 대해서는 세계양차대전의 중징계로 내치셨다. 그런데도 회개의 징후가 안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미국으로 촛대를 옮기신 후, 미국이 세계를 이끌게 하셨다. 그러나 그 미국조차 다시 타락하자, 이젠 그 아시아 일곱 교회의 메노라처치(촛대교회)는 한국교회 쪽으로 옮겨졌다. 그런 한국에서 현대판 ‘아시아 메노라 일곱교회’의 희망의 불을 당겨주다가, 지금 또 다시 그들의 부패와 탐욕으로 인해 불이 꺼지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치유방법이 일단 ‘교회괴사 증후군’으로 나타나셨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예수께서 목표하는 개혁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AD 1세기의 초대교회가, 특히 아시아 일곱교회가, 범례(範例)적으로 보여준 역사이다. 첫사랑의 회복은 그런 결과를 창출하고, 또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이런 초대 아시아 일곱교회가 보여준 대개혁을 실현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교회에 소독약을 뿌리고 계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첫사랑(십자가의 삶)을 회복한 신앙은 속죄양 메시아 예수의 인류 구원권과 심판권을 확신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와 영원한 미래의 통치권을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그 확신자는 그 통치권자의 지체(肢體)가 되어, 그 정의의 법을 전 인류와 피조물을 대상으로 실천하는 신앙을 지녀야 한다. 그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신앙을 성도들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
이 교회개혁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명령이시다. 이에 응하는 교회가 21세기 ‘아시아 일곱교회’가 켜는 ‘메노라(촛대)’의 하나를 켠 교회이다. 오늘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 명령 앞에서 예외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초대교회 당시의 ‘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주신 편지이다.
이를 위해 모든 교회들은 자기 내부의 ‘무저갱에서 올라온 독균’을 제거해야 한다. 니골라당, 이세벨, 유태회, 발람 등 독균들을 철저히 소독하고 걸러내야 한다. 이젠 피할 수 없이 그 작업에 진지하게 나서는 교회만이 살아남는다. 오늘의 교회괴사 증후군은 이런 면에서 그 의미를 다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로지 교회에 소속된 이 모든 가치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그들의 촛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배우며,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전하는 일에 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정의의 법을 세상에 선포하고, 희생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생명을 걸고 집중하며 헌신한다. 이로써 네가지 독균을 지닌 자들은 저절로 걸러지게 된다. 즉 성전 바깥마당으로 이 무리들은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성경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는 역사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