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C 개혁신학】(3)역사적 배경 : 유럽대륙의 개혁신학

▶ 시리즈3 :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신학 ▶김영규 개혁주의성경연구소장의『17세기 개혁신학』2015. 최종본으로 게재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2022-10-20     리폼드 투데이
김영규 박사 프로필

▷독일 궤팅켄대학(T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74회 
▷총신대학교 신학과(B.A.), 74학번.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Director, Research Institute for the Bible and Reformed Theolegy(www.ribrt.org)


주요저서 및 논문
■ 『Calvin and the Old Testament:Sola Scriptura and the Trintarian God as an Unique Author of the Old Testament(Germanic), 1993. ISBN 89-950009-1-0 93230』(Seoul 1994.) - 궤팅켄대학 박사학위(Th.D.) 논문
■ 『A Dialogical Document and the Metaplasmic Phases of the Pre-Mosaic Hevrew hehind Gen 23.(Germanic. 1993.) ISBN 89-950009-0-2 93700』(Seoul. 1994.)
창세기 23장에 관한 논문은 인류 역사 중 20세기에 와서 땅이 그 창세기 기록의  진실을 밝힌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인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고대 애굽어 기록들과 문헌들 편집의 최고 권위자이었던 H.W.Helck 교수와 고대 아카드 언어나 고대 슈메르 언어의 대가였던 D.O.Edzard의 자문을 받아, 독립적으로 주전 2400년 전의 고대 슈메르 문서들의 대화체 기록 방식들과 동일한 시기의 셈족 기록물들인 에불라 토판들에서 발견된  대화체 기록 방식들 및 고대 애굽 중 왕조의 편지들이나 기록물들에서 증거된 대화체 관용 표현들을 연구하여, 지금 현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그대로가 그 당시 "대화체 중재재판 판매 문서"의 직접적인 내용임을 증명한 논문이었다. 그런 대화체의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야곱에 관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 지금 창세기는 완성된 후  많은 세월을 지나 요셉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첨가된 것은 그 기록자를 알리는 간기(Colophon)라는 사실이 가정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체 기록에 있어서 '그리고 역시 누가 누구 앞에 이르기를'과 같은 직접 화법 인용 관용구는 셈족 에불라 토판에서도 발견이 되나, '그리고 역시' 없이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하여 이른 것에 대해서' 등과 같은 직접화법 관용구는 후대 고대 애굽의 직접화법에서 증명이 되지 않는 창세기 족장시대에 해당된 고대 애굽 왕조들인 12 왕조와 13 왕조의 고유한 표현방식이라는 것이다.
■ 『17세기 개혁신학』(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5.)
■ 『조직신학 편람 I,II-2,III,IV.』(개혁주의성경연구소, 1998.)
■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도서출판 하나, 1998.)
■ 『Biblica Hebraica et Graeca(Archaic Hebrew Texts and Greek Handwriting Texts of the First Century AD.) ISBN 89-89519-02-0 93230, 2002, RIBRT』(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2.)
■ "Paleographical Dating of 46 to the Later First Century,
 (Biblica -로마교황청 직영 국제학술기관지, Vol. 69, No. 2, 1988.)  P46(최초 바울서신 모음집 사본)의 연대 측정이 주후 1세기 말인 최소한 도미티안 황제시대 이후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또한 필자에 의하면, "P46의 필체는 주후 1세기 안에서는 물론 1세기 전후 수 많은 문헌 파피루스들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게 지금 남아 있는 주전 3세기 전형적인 교육교본 필체를 가진 파피루스 사본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https://www.friktech.com/rel/p46.htm

■ "도르트회의 Marburg 대학의 대표자 Rudolphus Goclenius(1547-1628)의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09.)
■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바젤대학의 개혁신학자 J.Jacobus Grynaeus(1540-1617)의 신학에 대해서"(대한논총, 2011.)
■ "초기 청교도 신학 안에서 법치사회의 기독교적 이상과 그 개혁정신 및 그 한계에 대해서"토마스 카트라이트의 논쟁자들을 중심으로"(대한논총, 2012.)

 

차 례

머리말 ... 5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7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24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59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09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130

V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343

V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369

맺는 말... 371

참고문헌... 373

                                    김영규 박사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신학

제네바에서 칼빈을 계승한 Theodor Beza(1519-1605)는 17세기 초까지 살았다. 그가 80세의 노년이었을 때,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대부분 태어나는 시기였다. 이 성직자들이 대부분 40대로서 총회에 참석할 때는 대륙에 아직도 많은 유명한 개혁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때였다. D. Tossanus에 따르면, 17세기가 시작하기 전에 16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개혁주의자들 중에서 베자와 제네바의 다른 신학자들외에도 J. J. Grynaeus, Stuckius, Zanchius, F. Junius, B. Copius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동료이면서 직접적인 제자로서 Th. Beza이외에도 불란서 출신인 Pierre Biret(1511-1571)가 칼빈과 함께 종교개혁자였지만 칼빈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부름을 받았다.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주의자들 안에서는 이 세 사람은 중요한 인물들이였다. 베자처럼 삐에르 비레 역시 칼빈의 참된 제자였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단순성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며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서 창조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었다. 예정과 유기에 대한 작정도 하나님의 의지이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목적도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데 두었다. 섭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에 의해서 다스리신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도와 같은 약속과 같은 은혜에 기초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에 의해서 거룩히 된다는 칼빈주의적인 신학이었다. 성만찬도 교회에 아주 유익되지만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었던 칼빈의 제자들은 10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강의를 듣지 않았어도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특별히 칼빈의 입장에 서 있었던 자들로서, 벨직고백(네델란드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던 Guido de Brès(1522-1567)와 Petrus Dathenus(1532-1588), Gaspar van der Heyden(1530-1586), Pierre de Cologne(Petrus Colonius, 1530-1571), Jean Taffin, Herman Moded(1520-1603), Adrianus Saravia(1532-1613), Johannes Helmichius(1537-1568), Jean Polyander(1535-1598)등이 있었다. 초기 네델란드 신교 개혁자들은 Zwingli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알려지고 1530년초 재세례파들의 영향으로 폐해가 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540년대로부터 칼빈이 알려지지만, 예를 들어 Jan Gerritz Versteghe(Ioannes Anstasius Veluanus, 1520-1570)의 경우, 개혁자들 중에 재세례파를 비판하고 칼빈을 선택하지만,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는 쯔빙글리의 입장을 따랐고 예정론을 버리고 중생과 새 생활을 강조하며 어느 정도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초기 개혁자들 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F. Junius가 레이든대학에서 가르치기 전에 레이든에서 가르쳤던(1587-1592) Carolus Gallus(Karl de Haan, 1530-1616)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베자아래서 공부하였는데, 그가 제네바에서 공부하기 전에 역시 화란의 초기 개혁도시인 Keulen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미 목사로서 봉사하였다는 자로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첫 칼빈주의 개혁자는 Guido de Brès라고 할 수 있다. 벨직고백서는 바로 그에 의해서 작성되어 A. Saravia와 H. Moded에 의해서 인정되고 수정되었다. Daniel Colonius의 아버지 Petrus Colonius는 칼빈의 신실한 제자로서 교회를 세울 때 칼빈으로부터 배운 그 정신으로 목회하였다. 특별히 Petrus Dathenus는 네델란드 남부가 칼빈의 영향권아래 있을 때 수도원 생활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자가 되어 18,19세의 나이에 수도원을 박차고 핍박을 피하여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유랑설교자가 되었다. 여러 도시를 따라 유랑하다가, 헨리 8세가 신교인들에게 개방성을 보이면서 런던으로 피신하면서 그 곳 피난민 교회를 섬기는 폴란드 개혁주의자 Johannes à Lasco를 만났고 다시 영국에서의 핍박을 피하여 완전한 자리인 엠덴을 거처 프랑크푸르트에 이르렀을 때, 루터주의 설교자들을 방해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 피난민들의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여기에서 유아세례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성만찬과 세례에 관해서 루터와 칼빈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세례는 은혜언약의 표징이고 믿는 부모의 자녀들은 그들의 이마에 세례의 표를 받기 전에 이미 은혜언약 속에 받아드려 진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어린아이가 잃지 않는 것이 그 아이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루터주의자들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세례의 필연성을 가르쳤다. 이런 확고한 입장에서 초기 지도자들은 사실 피난민 목회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목회생활 가운데에서도 네델란드를 위해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를 번역하고 예배를 위한 시편들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초기 개혁세력들에게 칼빈과 베자의 영향이 크지만, 바로 이어지는 세대에게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자들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잠시 칼빈에게서 배운 바있는 F. Junius를 제외하고 Daniel de Dieu(1540-1607), Johannes Fontanus(1545-1615), Wernerus Helmichius(1551-1607)등은 모두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치고 있다.

프레데릭 3세의 지배 시에(1559-1576) 그 선제후가 개혁주의자들을 보호함으로 이런 새로운 분위기가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스위스에 있는 다른 개혁중심지들과 함께 점점 더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개혁주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 대학은 1386년에 세워진 대학이지만, 선제후 Otto Heinrich 하에 있는 사람들이 온건하게 루터주의 신교에 기울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이미 스위스에 대해서 호의를 가진 교수들(Martinus Frechtus, Simon Grynäus, Sebatianus Münsterus, Hieronymus Buschius)이 있었고 철저히 개혁주의적인 사람들인 Petrus Martyr Vermiglius(1560-1562), Musculus(1497-1563)가 그 교회의 관리들과 친밀해 있는 상태였다. Johannes à Lasco에 대해서 신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한 Petrus Colonius등 화란 개혁주의자들을 영접할 준비가 된 도시였다.

그러나 그 선제후가 죽자(1559년 2월 12일), 44세 나이로 프레데릭 3세가 그를 계승하였다. 그기 즉위하자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토론이 주선되고 논쟁이 일어났는데, 거기에서 선제후 프레데릭 3세가 칼빈주의에 강한 인상을 받아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개혁주의 학자들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모이게 된다. 더구나 1560년 4월에 멜랑히톤이 죽자 대학이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미 선제후 Otto Heinrich의 때에, 프랑스 피난민으로서 Petrus Boquinus(Pierre Bouquin)가 1557년 하이델베르그로 와서 1558년에 세 번째 신학교수가 되었던 이래, 이제 1561년 Petrus Martyr Vermiglius의 추천으로 Zacharias Ursinus(1534-1583)가 대학교수로 부름을 받고, 같은 해에 Caspar Olevianus(1536-1587)가 대학교수로 옮김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Z. Ursinus와 Caspar Olevianus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그것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Z. Ursinus도 Wittenberg에서 공부하였고 거기에서 멜랑히톤과 밀접히 교제하다가 그의 추천에 의해서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칼빈, 부쪄, 불링거와 교제하였고 특별히 Petrus Martyr Vermiglius와는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C. Olevianus는 법학자가 되기 전에도 칼빈의 책들을 읽었고 신학을 할 때 처음 제네바에서 시작하여 쮜리히의 Petrus Martyr Vermiglius, 로쟌에서 베자의 강의를 듣다가 마지막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었다. 그 후 자신의 고향인 Trier에서 선생과 설교자로서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카톨릭주의자들의 저항으로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제후들의 청원에 의해서 풀러나게 되었고 자신이 프레데릭 3세의 가족과의 인연과 프레데렉 3세의 신용이 두터웠던 Peter Martyr의 추천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로 오게 되었다. Z. Ursinus도 역시 1558년 Breslau에서 가르치다가 최종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Caspar Olevianus가 합세하였던 것인데, 이들이 공동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함으로 다음 세대의 개혁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이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교수해 왔던 Hieronymus Zanchius(1516-1590)가 1568년 이래 하이델베르그에서 교의학이 가르쳐지기 시작하여 유럽의 많은 신학생들이 이 곳에 모이게 되어, 신학을 공부하려 유학할 때 필히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이 Hieronymus Zanchius는 이태리 출신 종교개혁자 Petrus Martyr Vermiglius의 제자로서 그 스승처럼 이태리를 떠나 Geneva, Strassburg등으로 피난민 생활을 하였다가 1553년이래 교수생활을 하였으나, 1561년 Martin Bucer가 죽은 후 스트라스부르그를 루터주의로 몰고간 Johann Marbach와의 성만찬과 예정론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Johann Marbach의 편에 있었고 인문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J. Sturm과 일부 교수들만이 H. Zanchius의 편에 있었지만, 결국 관원이 연합적 입장을 만들어 두 편으로 하여금 서명토록 하였으나(1563. 5.28), H. Zanchius는 자신의 기본입장을 고집함으로 평화를 깨뜨린 자로서 그 곳을 떠나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Chiavanna에서 짧게 목회하다가 지금 Heidelberg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역량을 가진 개혁주의 교수들이 하이델베르그에 모여 개혁주의 신학을 꽃을 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3세가 죽자 그를 이은 선제후 Ludwig VI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그 도시는 다시 루터주의의 시대로 변하여 개혁주의자들이 쫓겨나게 된다. 이 루터주의 복고시대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개혁주의 교수들은 물러나고 피신하여야 하였을 때, 선제후의 동생인 Johannes Casimir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Johannes Casimir에 의해서 관할하고 있는 곳에 학교를 세워 하이델베르그에서 피신온 자들을 받아 드렸다. 이 학교가 유명한 Neustadt의 대학이다. 이 대학이 Johnnes Casimir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그의 아들 프레데릭 4세에 이어지면서 개혁주의자들의 산출지가 되었다. Z. Ursinus는 하이델베르그에 있을 때부터 로쟌으로부터 교수청탁을 받았으나 선제후의 거절로 옮기지 못하였으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예감이 선제후 프레데렉 3세가 죽은 후 현실화되었다. 프레데렉 3세가 죽은 후 14일 후에 Daniel Tossanus가 개혁주의에 강한 반대자인 Paul Schechsius에 의해서 교체되었고, 그 다음 Caspar Olevianus가 교수자리를 잃었다. 다른 교수들도 거주지와 생계비가 거절되어 버렸다. 1577년 Petrus Boquinus가 추방된다. 그는 추방되어 Lausanne에서 목회자와 교수로서 섬기다가 거기에서 1582년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1578년 봄까지 600명이상의 설교자들과 교수들이 내쫓김을 당하였다. 그러나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새로운 보호지역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 곳이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들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 Neustadt가 새로운 중심지가 되는 것은 그 도시로 Z. Ursinus를 포함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이 옮기기 때문이었다. Z. Ursinus도 거기에 예외가 아니어서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선제후 Ludwig VI의 힘에 의해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Neustadt로 옮겨 이사야주석에 대한 강의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남은 생애를 거기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가 하이델베르그의 시기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시기에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석(Explicationes Catecheticae)』과 『기독교적 권고(Admonitio christiana)』이 출판되었다. 특별히 후자의 작품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이 확고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책은 루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들과 오해들에 대한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은 인성과의 본질적인 속성을 실재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이 비난하기를,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재적으로 공유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들의 각각에 대한 독특한 것이 그리스도 인격에 공유적이다는 주장이다는 변증이다. 그래서 우르시누스는 루터주의자들이 본성과 위격사이의 차이를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둘째로 성만찬론에 있어서 개혁주의자들이 성경구절이 애매하여 다른 구절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고 또한 말씀들이 새롭고 외래적인 의미를 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르시누스는 그 반대로 매 말씀이 철저히 판명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칼빈의 독특한 주장으로서 우르시누스가 그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개혁주의자들은 그 말씀들은 유사와 전체 성경의 해석에 따라서 설명한다며 거기에 더하거나 감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른 비난 즉 쯔빙글리와 함께 오해된 해석 즉 몸‘이다’에서의 ‘이다’가 단순히 ‘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고 강화하며 제공한다는 표시로 해석하면서, 칼빈처럼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혹은 장소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가 관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relativa et spiritualis) 현존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셋째로 예정론에 대해서 섭리론과 구별하면서 전자는 인격체에 관계된 것이지만, 후자는 모든 피조물들에 관계한다고 하면서, 그 예정의 실제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유기의 원인도 죄에 원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있다는 것인데, 만약 유기의 원인이 죄에 있다면 만민들이다 죄인들이므로 버림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582년이 기울어지면서 Z. Ursinus는 병을 얻어 오랜 하이델베르그 친구였던 F. Junius앞에서 1583년 3월 6일 사망하기까지 교회를 섬겼고 이 때에 David Pareus, Fr. Gomarus, Lubbertus Sibrandus 등의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다음 세대 개혁주의들 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이 되었다. 즉 그를 하이델베르그에서 쫓아냈던 선제후 Ludwig VI가 같은 해 10월 12이 사망함으로 그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Friedrich가 개혁주의를 다시 받아드림에 따라 Ursinus의 하이델베르그 옛 동료인 F. Junius가 하이델베르그 교수직을 다시 얻었고 또한 그의 수제자인 Davis Paraeus가 1584년에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역시 Daniel Tossanus도 1586년에 교수직을 회복하여 돌아와 1602년까지 가르치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는 헤르보른(Herborn)이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칼빈주의 대학으로 만든 두 기둥 중 하나인 Caspar Olevianus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쫓겨나 선제후 Johann von Nassau의 영역인 Berleburg에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고 이 때 베자의 편집아래 중요한 책들을 펴냈다. 그 후 선제후 Ludwig VI세가 사망한 후 1584년 4월에 학문이 많고 외국어들에 능한 선제후 Ludwig von Wittgenstein가 그를 Herborn으로 데려와서 거기에서 가르치도록 하였다. 같은 해에서 일찍이 하이델베르그 철학교수이였다가 쫓겨나 Neustadt로 피신하였다가, 헤르보른(Herborn) 교수로 부름을 받은 자가 Johannes Piscator(1546-1625)이다. 이 Johannes Piscator는 원래 스트라스부르그의 학창시절에 H. Zanchius의 강의는 들었으나, J. Marbach의 신뢰받는 제자이었고 역시 그 당시 Zwingli의 경향을 가졌다고 알려진 Wittenberg를 피하고 Tübingen를 택할만큼 루터주의의 입장에 있었으나, 점진적으로 H. Zanchius의 강의에 대한 기억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 연구를 통하여 개혁주의의 입장으로 바꾸어 졌던 인물이다. 비록 J. Marbach의 신뢰 속에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으나, 자신의 개혁주의 입장을 감출 수 없었고, 따라서 강의 중에 나타난 소위 Extra-Calvinisticum의 입장과 예정론의 입장 때문에 강제로 강단을 떠나야만 하였던 자이였다. 그가 강제로 떠나게 된 것은 루터주의자들의 권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Sturm의 보호는 길지 못함에 따라서 1573년 봄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던 하이델베르그에서 철학사강사로 자리를 얻어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별하였던 것이며, 하이델베르그 시절에 Tremellus, Junius, Ursinus와 우대관계를 얻게 되었다. 특별히 그 생애에 가장 영향을 끼쳤던 Caspar Olevianus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Ludwig VI의 등장으로 갑자기 자리를 잃고 거리에 방항하여야 할 처지가 되었으나, 마침 Caspar Olevianus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자리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Caspar Olevianus는 1587년 3월 12일 사망하면서부터 그가 Herborn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독일 개혁주의 신학의 두 기둥이 사라지고 그의 제자들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의의 원인(causa meritoria justificationis)이 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고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입장이 Beza, Grynaeus, Polanus 등에 의해서 거절되었고 1603년 갑대회(Synode von Gap)에서 혐오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라로셀 대회(Synode von La Rochelle)에서 그 입장이 변경되었어도 그와 같은 입장을 주장하였던 세당(Sedan)의 Daniel Tilenus(1561-1633)로부터 지지를 받았어도, 시간에 지남 따라 몰리내우스(Pierre du Moulin)의 반대를 받았다.

그 외에 Herborn 대학에서 의미 있는 학자로서 Johann Heinrich Alsted(1588-1638)가 있다. 그는 헤르보른에서 철학을 10년 가르치다가 1619년 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신학의 성격 때문에 그는 Keckermann의 제자로 불리어 지고 있지만, 천년주의의 옹호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학 전체를 , 선지식(Praecognita),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 요리문답(Catechesis), 스콜라 신학(Theologia scholastica), 실천신학 혹은 교회신학(Theologia practica sive ecclesiastica), 변증신학(Theologia controversa sive polemica)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의 개념에 있어서 모든 계시진리의 샘으로서 성경이외에 다른 것을 신학의 원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Sadeel, Zanchius, Junius, Danaeus 등의 자신의 선행자들을 가지는 개념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념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itionis)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먼저 다루고 그 말씀의 부분들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둘째로 하나님의 행위들(actiones Dei)에 대해서로 나누고, 이 후자를 다시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즉 작정과 그것의 집행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서 예정의 집행(executio praedestionationis) 아래 은혜언약과 그것의 다양한 경륜들로의 발전이 다루어지고 있고 여기에 기독론이 종속하고 있다. 자연언약(foedus naturae)과 은혜언약(foedus gratiae)로 나누는데, 멜랑히톤과 관계하는 성격이 있지만, 은혜언약 안에 구약과 신약경륜을 포함하여 기초와 실체에 따라서 동일한 복음을 내포하며 다만 선포와 경영의 양식(modus promulgationis et administrationi)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다.

Herborn에 대학이 생길 즈음에 화란의 Franeker에 대학이 1585년에 생겼다. 그 대학의 첫 학장은 Martinus Lydius(1539-1601)로서 Ursinus의 제자이다. 이미 Ursinus의 제자이면서 동료로서 1567년부터 1576년까지 praeceptor collegium sapientiae로서 봉사였다가 루터주의의 회복시에 다른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나 피난생활을 하다가 Franeker 초대학장으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동료교수들인 Henricus Antonides Nerdenus(1546-1614)와 Sibrandus Lubbertus (1555-1625)도 같은 시기에 부름을 받았던 자들이다. 특별히 Sibrandus Lubbertus는 브레멘(Bremen)에 개혁주의 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J. H. Molanus의 라틴학교에서 베자의 책을 교재로 하여 개혁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여기에서의 배웠던 동료들이 다시 Heidelberg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에 같이 레이든 교수가 되었던 Johannes Polyander가 같은 라틴학교 출신이다. 다만 Johannes Polyander는 J.H.Molanus를 계승한 Christophel Pezelius 밑에서 공부하였을 뿐이다. 그런 시기를 지나 1575년 Wittenberg, 1576년 Genève에서 공부하였고 이 곳에서 Ubbo Emmius, N.Casaubonus와 친분을 갖게 되었으며 1577년 Marburg을 거처 1580년 Ursinus가 있었던 Neustadt에서 Piscator, Pareus, Gomarus와 친분을 갖게 된다.

Ludwig VI세가 죽고 개혁주의가 Heidelberg 대학에 회복된 이후 Daniel Tossanus이 학장이 되었을 때, 1587년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가 이 학위를 받기 전에 Franeker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게 되었는데, 상기의 세 교수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로 교수직을 얻었다. Ursinus, Grynaeus, Sadeel의 언어와 스타일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일생의 특이성은 도르트회의에서 정리되기 전에 그의 친구인 Petrus Bertinus와 아르미니우스의 계승자인 Conrad Vorstius와 논쟁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체 내의 동료들인 Johannes Drusius와의 잠언 8장 22절에 관한 논쟁, Johannes Maccovius와의 ‘그리스도의 부활, 마지막 심판, 칭의, 그리스도의 화목의 죽음의 충분성과 그 영향’ 등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의 오래된 친구인 Menso Alting과 함께 대표적 칼빈주의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같은 Franeker 동료인 H. A. Nerdenus(van der Linden)는 Bullinger의 입장을 따르고 새로운 젊은 사람들 Cocceijus, Episcopius등에 대해서 우호적이였다. 또 다른 Franeker 교수로서 Johannes Maccovius(1588-1644)가 유명하다. 그는 하이델베르그 히브리 교수였다가 30세쯤 되어 폴란드로 옮겨 Dantzig에 있었던 Bartholomäus Keckermann(1571/3-1609)의 제자인데, 폴란드를 떠나 유럽의 여러 대학들(Heidlelberg, Marburg, Leipzig, Wittenberg)을 거쳐 예수이트교도들와 소키니우스주의와 논쟁들을 통하여 개혁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1613년 이래 네델란드에 와서 1613년 10월 21일에 Franeker에 등록하여, 그 다음 해 1614년 3월 8월에 Franeker에서 학위를 받았고 거기에서 사강사로 봉사하다가 1614년 상기 H. Antonides Nerdenus가 사망하자 그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1615년 1월 28일 extraordinarius Professor, 1615년 6월 16일 ordinarius Professor). 그러나 도르트회의를 기점으로 약간의 차이가 4년 후에 많은 점들에 있어서 자신의 학위논문 지도자인 Sibrandus Lubbertus와의 갈등을 갖는 결과를 얻었다. 이 점에 있어서 해석의 차이가 있으나, 아마 신학적인 근본적 입장에 있어서 차이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Maccovius는 F. Gomarus, Rivetus, Festus Hommius, W. Amesius, G. Voetus처럼 강한 타락전 선택설을 입장을 가져, ‘유기자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 결국 파멸한다’(Reprobos necessario peccare ac tandem perire),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과 개인들의 구원을 원치 않았다(Christus non vult omnium et singulorum salutem)’는 주장이다.

반면에 Sibrandus Lubbertus는 Hidding의 입장에 반대하여, ‘죄들의 은혜로운 허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인 긍휼일 수 없고 시간상 하나님의 외적역사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형벌로 정하셨다’(Deum destinare aliquos ad poenam)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죄를 의도하셨고 죄가 하나님께서 시준한 목적이었음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non possumus negare, quin Deus intendat peccatum, et peccatum sit finis, ad quam Deus collimat)고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세상을 위해 충분하고 유효하다는 데에 더 강조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Satisfecit igitur Christus pro omnibus homnibus, sed non eodem modo. Nam pro electis merito et efficacia simul; pro caeteris, merito. 그래서 그의 입장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이들의 죄를 위한 만족이였다는 것이요 동시에 그리스도의 힘과 열매는 택자들에게와 나머지에게도 유익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이 점은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일치한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후에 1617년 교수로 부름을 받은 Johannes Acronius(1565-1627)도 같은 Neustadt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Lubbertus의 영향으로 Maccovius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는 Lubbertus의 입장을 지지한다기 보다, Conrad Vorstius(1569-1622), Arminus, Socinus의 입장들을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추천하였다는 점에서 Lubbertus의 입장과 다르다.

일찍이 세워진 Franeker대학 이외에 네델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Leiden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Franeker보다 10년 전인 1575년에 세워졌다. 이 대학에서 칼빈과 베자의 제자인 Carolus Gallus(1530-1616)와 Lucas Trelcatius가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으로 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592년 F. Junius가 거의 청강자들을 잃은 C. Gallus 대신 professor primus로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옮긴 이후부터이다. 그가 1602년 흑사병으로 갑자기 죽기까지 레이덴 대학에 머물면서 가르쳤다. 이미 신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레이덴 대학에 와서 신학의 전성시대에 도달하여 많은 저서를 써서 남겼다. 그리고 2년 후에 F. Gomarus(1563-1641)가 교수로 오게 되는데, 후에 도르트회의에서 크게 활약하는 Festus Hommius(1576-1642)는 이 두 신학자들 밑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제자이다.

F. Gomarus는 스트라스부르그의 Johannes Sturm 밑에서 공부하였고 1580년 Neustadt에서 Z. Ursinus, H. Zanchius, D. Tossanus, F. Junius(히브리어), S. Stenius(헬라어), L. Pithopoeus(라틴어), F. Crellius 와 J. Jugnitius(철학)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82년 Oxford로 가서 J. Reinoldus의 강의를 들었고 1583년 Cambridge로 옮겨 칼빈의 직계인 W. Whitaker밑에서 B.A.와 M.A.를 마쳤다. Cambridge에서 라무스주의에 접촉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라무스 이론 사이의 종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루터주의로부터 개혁주의로 다시 회복된 하이델베르그에서 D. Tossanus, F. Junius, 바젤에서 와서 루터주의 신학자 Timotheus Kirchen의 자리를 대신하였던 J. J. Grynaeus, Marburg 대학에서 구약교수로 있다가 루터주의 신학자 Marbach 대신해서 그 곳으로 옮긴 Georgius Sohnius(구약, 신조학, 설교학) 밑에서 공부를 마치고 피난민 교회를 섬기다가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자마자 레이든 대학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학창시절의 동료이였던 Antonius Thysius(1565-1640)도 후에 레이덴 대학으로 부름을 받았다. 나이가 조금 많은 Jacobus Arminius(1560-1609)는 F. Junius의 후계자로 1602년에 그 당시 궁중설교자이였고 제네바 유학시절의 같은 동료이였던 Johannes Wtenbogaert(1557-1644)의 압력에 의해서 레이든 대학으로 오게 된다. Arminius는 첫 레이든 출신 교수인 셈이었다. 그리고 초기 레이든 교수였던 Lucas Trelcatius의 아들인 Lucas Trelcatius(1573-1607)이 유럽의 여러 대학들(Heidelberg, Bazel, Zürich, Genève)에서 공부를 마치고 베자아래서 설교자로서 섬기다가 1603년부터 레이든에 옮겨 거하는 동안 1606년 교수로 임명된다. 이렇게 최근 교수들이 된 젊은 세 학자들이 공동저서를 낸 것이 『Syntagma disputatiorum theologicarum』이다. 그러나 Arminius와 긴 논쟁으로 말미암아 Gomarus가 레이든 대학을 떠나자 큰 변화가 있었다. 그 자리에 Steinfurt의 Gymnasium Academicum 교수이었던 Konrad Vorstius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 학자는 특별히 그의 최근 저서 『Tractatus theologicus de Deo sive der Natura et Attributis Dei』에 의해서 영국뿐만 아니라 하이델베르그 등의 모든 학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지만, 레이든 교수가 되었다. 이를 위해 역시 아르미니우스를 레이든 교수로 오게 하였던 Johannes Wtenbogaert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궁중설교자로 있는 동안(1601-1617)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초기 네델란드 칼빈주의자인 Jean Polyander(1535-1598)의 아들이요 브레멘의 라틴학교 출신이면서 하이델베르그와 제네바에서 공부하였던 Johann Polyander(1568- 1646)가 1611년 10월7일에 새로운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 임명이 후기 레이든 대학의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념강의 제목은 『De vera S.S. Theologiae existentia ac sublimi natura』이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제자인 젊은 Simon Episcopius(1583-1643)가 그 대음해 1612년 2월 23일에 교수직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갈등의 상황은 도르트회의가 열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되었고 그 회의에서의 승리가 칼빈주의 신학이 항존적으로 정착이 된다. 바로 도르트회의 이후에 건전한 교수진들로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즉 1619년 7월 20일에 Antonius Walaeus가 Middelburg 대학에서 Leiden 대학으로 옮겨 『Oratio de recta instiutione studii theologici』이란 제목으로 기념강의를 하였고, 2달 안되어 Antonius Thysius가 Harderwijk대학에서 레이든 대학으로 옮겨 『Oratio de theologia eiusque studio capessendi』이란 제목으로 기념강의를 하였다. 그 다음 해 이어서 Petrus Molinaeus 때문에 Andreas Rivetus가 레이든 대학 교수로 오게 되는데, 이런 변화된 레이든 교수진들에 의해서 차후 네델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력 있는 기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변화가 개혁주의 신학사 전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Z. Ursinus와 C. Olevianus 때문에 Heidelberg 대학이 의미를 얻게 되었고 그가 Neustadt를옮김으로 거기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 옮겨지며, 또한 C. Olevianus가 Herborn으로 옮김으로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처럼, 네델란드에서는 F. Junius와 함께 F. Gomarus가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가 레이든 대학으로 떠나 Middelburg으로 초대받았을 때, Middelburg에는 레이든 대학의 초기제자들인 Castellanus, A. Aurelius, Antonius Walaeus나 G. Voetius 같은 그의 제자들이 목회하거나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으나, 가르치는 일에도 관여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Gomarus가 Groningen에 있을 때, 도르트회의에 Middelburg 대학교수로 Antonius Walaeus가 대표하여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Saumur대학에서 자신의 조국으로 갔던 Robert Bodius 자리에 Gomarus를 초청하였을 때, Gomarus는 학장으로서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이든 대학의 자신의 자리를 Conrad Vorsitius가 계승하였던 것처럼, Saumur대학에서의 자신의 자리도 John Camero가 계승하였다. 다만 Groningen 대학의 계승자는 S. Maresius이었다. 어떻든 Gomarus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특징과 그 노선을 알려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신학의 특성을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구별되고 있다.

첫째로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다.

주님 앞에 신비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해서 신중하게 논하여야 하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정은 보편적으로 모든 만물들에게 미치고 특별히 지적피조물 즉 천사들과 인간들에 대한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에 대한 특별한 예정에 있어서 문제는 어떤 인간들을 택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예정의 대상(objectum praedestionationis)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명확히 예지되고 창조되어 타락한 인간, 혹은 창조되고 타락하게 될 인간을 그 예정의 대상이었거나, 명확히 예지되지 않은 인간 혹은 좁게 창조될 수 있었던 인간을 예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마루스의 경우 그들의 입장들에 대한 약점들을 인식하면서도 마지막 견해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변명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그의죽음은 하나님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었다는 칼빈주의 독특성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은 역시 모든 택자들을 위한 죽음이었다는 도르트회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순종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그의 순종의 시작이라 보았다. 역시 Piscator의 입장에 반대하여 그의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였고, 그의 수동적인 의가 그의 자발적인 순종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에 기초하였다는 입장이다.

셋째로 영국의 퓨리탄들의 신학의 영향으로 주일성수를 하였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Perkins의 입장에 따라 엄밀한 안식일 성수를 주장하였던 자들이 Middelburg의 설교자 William Teellinck와 Zierikzee의 설교자 Godefridus Udemannus이였다. 역시 A. Walaeus가 그들의 편에 있었다. Godefridus Udemannus는 처음 1612년에 주일성수에 관한 글을 출판하여 1621년에 제 2판을 내었다. 주일성수에 대한 William Teellinck의 또 다른 글이 1622년에 출판이 되고 다시 1627년에 출판되자, 이에 대한 Tolen의 목사 Jacobus Bursius의 반박의 글이 같은 해에 출판됨으로 그 논쟁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이논쟁이 W. Teellinck의 편에 있었던 G. Voetius가 같은 해에 자신의 글을 펴냄으로 논쟁이 되었다. 이미 도르트회의에서 논의된 유대 안식일은 지금 폐지되고 주일날만 그리스도에게 지켜져야 한다고 결정하였었는데, 그 때의 결정은 예배에 방해되는 모든 종류의 오락을 금지하는 정도였다. 지금 Jacobus Bursius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완전한 유대주의를 심으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 씨 뿌리고 쟁기질하며 수확하고 여행하는 일등은 사람이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Jacobus Bursius의 입장을 Gomarus가 수정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즉 일반적인 안식일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나 후나 땅위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타당하지만, 특별한 안식일 계명은 주님의 임재까지 유대민족에게만 관련된 것이다. 영원한 언약은 유대적인 안식일이 계속 지켜져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님의 날 혹은 주일의 첫날은 사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우리 모두가 영적인 안식일 지켜야 하고 계시된 예배의 날을 어떠한 더럽힘이나 우상숭배함이 없이 거룩하게 경애해야 한다는 온건한 정도의 주장이었다.

위의 세 대학들 외에도 Groningen대학이 1614년에 세워졌다. 첫 primus professor로서 헤르보른 대학에서 신학공부하여 거기에서 잠시(1612년) 교수직을 얻어 봉사하였던 Herman Ravensberger(1586-1625)가 1614년에 이 곳으로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F. Gomarus가 1618년 부름을 받아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여기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후 1625년에 Emden의 유명한 목회자 Menso Alting의 셋째아들인 Heinrich Alting(1583-1644)이 Herman Ravensberger를 계승하였다. Heinrich Alting도 역시 Herborn 출신으로 Johannes Piscator, Mattias Martinius, Wilhelmus Zupperus 밑에서 공부하였다. 세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Paltz의 선제후 자녀들의 개인교사로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자녀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하이델베르그에 함께 거하기 시작하여 거기에서 학위로 받고 1616년에 교수자리를 얻게 된다. 거기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Abrahamus Schultetus, Paulus Tossanus와 함께 도르트회의에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1622년 하이델베르그에 폭동이 일어나 제수이트교도들의 수하에 들어감에 따라서 가까스로 그곳에서 숨어 생활하다가 도시를 떠나 여러 곳으로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1627년 6월 16일에 Groningen 대학에 자리를 얻어 봉사하였고 1634년에 다시 하이델베르그에 들어가고자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Groningen에 다시 돌아와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특별히 그의 아들인 Jacob Alting(1618-1679)이 1643년 1월 13일에 Groningen 대학의 히브리서 교수가 되었다. 신약학교수는 1667년에 비로서 되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코케이우스와 같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따라서 동료교수인 Samuel Maresius에 의해서 펠라기우스주의자, 소키누스주의자, 카톨릭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Groningen 대학의 다른 대표적인 학자는 Samuel Maresius(1599- 1673)이다. Samuel Maresius는 F. Gomarus가 Leiden 대학을 떠나 프랑스의 Saumur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 후 1643년 Groningen대학에 교수로 옴으로 오랫동안 여기에서 가르쳐 왔던 F. Gomarus의 신학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Gisbertus Voetius와 화합하지 못한 것은 개인적인 성격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J. Alting과 J. Cocceijus에 대한 "Novatores"로서의 비판은 정통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A. Rivetus와 제네바의 동료였던 F. Spanheim(1600-1649)의 뿌리에 서서 역시 Saumur 대학의 아미롤드주의(Amyraudisme)에 반대하였고 역시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사이의 통일성을 추구한 학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 밖에 17세기 개혁주의의 중요한 인물인 Gisbertus Voetius(1588-1676)는 Gomarus와 Arminius가 레이든 교수로 있을 때, 그들의 제자이다. 1611년부터 계속 목회생활을 하였다가 1619년 여름에 도르트회의의 부름을 받았다. A. Rivetus의 추천에 의해서 Utrecht 신학교 교수로 부름을 받은 것은 1634년이었다. 그 다음 해에 목사로서도 부름을 받았는데, 이 곳에서 42년 동안 섬기게 되었다. 그는 그 학교에 8가지 강좌를 열어 강의하였고 주 중에 사적으로 공적토론들을 이끌었다. 우선 그는 코케이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우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과 같이 죄의 완전용서를 주장하였고 역시 구약성도들도 신약에 성도들과 같은 방식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Coccejus는 παρεσις와 ἀφεσις 사이의 차이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구별은 Johannes Chrysostomus, Photinus, Theophylactus, Beza, Johannes Cloppenburg에 호소하였으나, Voetius는 시대나 인간의 어떤 구별 없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고 시편 103편 3절, 시편 65편 4절, 시편 85편 3절은 ἀφεσις의 용서(ἀφεσις-remissio)를 말한다고 대변하였다. Voetius의 이런 논증과 반대는 코케이우스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 사이의 질적이고 양적인 차이(Spiritus servitutis ad metum, Spiritus adoptionis)에 대한 반대논증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건전한 선교신학의 효시자가 바로 Voetius의 선교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교회개척론에서(De plantatione ecclesiarum) 선교의 목적은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강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예정론과 선교가 잘 조화되었던 것은 그의 섭리에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였다. 이에 따라서 선교의 대상에는 이방인들, 유대인들, 모슬렘인들을 포함하는 불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이단들(haeretici), 분리주의자들(schismatici)을 포함하고 있었다. 파송인들에 대해서도 선교사들, 조사들(adjutores), 다른 조력자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구체적인 선교의 수단들도 다양하게 논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화란 땅의 신학적 분위기와 그 배경과 함께 다른 유럽지역에서 발전을 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Marburg 대학은 17세기 초까지 멜랑히톤 신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1584년 Heidelberg 대학의 교수로 발탁된 Georg Sohnius(1551-1589)는 이미 1574년에 사강사로 1575년에 구약교수로서 활동하였으나, 늦게까지 멜랑히톤 신학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음이 알려지고 있고, 칼빈주의에 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부쩌의 신학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점이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성격처럼 처음부터 대학은 칼빈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예정론에서 그러하였는데, 그런 요소는 Lambert von Avignon, A. Hyperius 등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그 중에서 아주 독립적으로 사고하였던 A. Hyperius의 저서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1569년 이래 Wilhelm IV세 아래 Georg Sohnius의 신학적 입장이 더 신뢰를 얻게 되어,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와 비텐베르그 교리 사이의 중용입장이 유지되어 왔었다.

Willelm IV세의 다른 형제 Ludwig IV세가 죽은 후, 그 자리가 선제후 Moritz에 의해서 계승됨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선제후는 팔방의 학자(시인, 작곡가, 수학자, 건축가)로서 여러 언어들(불어, 영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히브리어)을 구사하거나 알았던 제후이었다. 그가 루터주의의 성례론을 결정적으로 싫어하였다. 그래서 베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선물을 가지고 84년의 노년의 베자를 두 번의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1605년에 3 가지 점들을 개혁하도록 하였는데, 첫째로 그리스도의 위격 중에서 신성이 다만 구체적으로 즉 인성자체가 아니라 전 그리스도로부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로 상들을 없애고 십계명이 가르쳐 져야 한다는 것, 셋째로 성만찬에서는 규정에 따라서 빵이 떼어져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이었다. 또한 교수들 중에서 루터주의자들인 두 교수들(Winkelmann, Balthaser Mentzer)이 경질되고 그 대신 Mother와 Caspar Sturm이 그 자리를 얻었다. 2년 후 궁중설교자로 Schönfeld가 들어 왔다. 이렇게 하여 이 지역에서 개혁주의 대표자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여하는 총대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멜랑히톤의 신학이 대표해 왔기 때문에, A. Tholuck은 예정론에 대한 판단도 멜랑히톤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그 후 Schönfeld가 Johnnes Crocius에 의해서 계승되었는데, 그는 궁중설교자이면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료 헤센주 궁중설교자 Neubauer와 함께 보편적 은혜를 좋아하여 절대적 작정(decretum absolutum)을 던져 버렸다. 네 번째 신학교수는 Eglin이었다. 이 사람이 바이겔리우스주의 즉 신비주의 혹은 천년주의를 반대하여 싸웠다. 이를 이어 Sebatian Curtius, Johannes Heine, J. G. Crocius등이 활동하여 루터주의나 데카르트주의를 경계하였다.

그 다음은 개혁주의자들의 도시 Bremen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 이 도시는 Jena에서 공부하였고 멜랑히톤 신학의 대표자인 Christoph Pezel이 이 곳 라틴학교에 온 이후부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 Nassau에 와서 교회의식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칼빈주의로 변화하였다. 그 지역은 멜랑히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레이든 대학의 부름을 거절하기까지 브레멘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도시가 칼빈주의의 다른 한 중심지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더 발전은 Emden에서 부름을 받은 Matthias Martini가 1610년 학장으로 옴으로 시작되었다. 역시 Marburg의 J. Crocius의 형제인 Ludwig Crocius가 같은 해에 구약교수로 왔고 1612년에 Isselburg와 Pierius가 교수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대표하여 Matthias Martini와 Lugwig Crocius가 도르트회의에 참여하였다. A. Tholuck이 지적하기를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온화한 입장으로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입장이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강제로 서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교회회의가 악을 크게 하였다는 입장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Ludwig Crocius의 1641년 한 편지에서 그들은 보편은혜 혹은 충분한 은혜를 좋아하였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 밖에 특별히 J. Coccejus가 브레멘 출신이었고 화란으로 옮기기 전에 브레멘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철학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위스의 개혁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먼저 Zwingli의 개혁도시인 Zürich의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Zwingli외에도 Leon de Juda, 히브리어 학자인 Pellicanus, Theodore, Bibliander, Bullinger, Ludwig Lavater, Gualter, Petrus Martyr, 교회사가 Rud. Hospinian등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되었고 계속 인척관계 속에서 계승되었다. Zwingli의 사위가 Gualter이고 Gualter의 사위들이 Ludwig Lavater와 Jose Simler이다. 또한 Ludwig Lavater의 사위가 Hospinian이었고 그의 사위인 Wilhelm Stucti가 1563년 신학교수가 되었고, Jose Simler의 사위가 Casper Waser인데 그는 1651년에 신학교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Bullinger가 타락후 선택설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나, 스트라스 부르그의 Zanchius는 1561년 자신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을 Bullinger, Ludwig Lavater, Jose Simler, Gualter등으로부터 동의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etrus Martyr의 예정론의 경우에도 엄밀한 예정론이 실천적 의미에서 온화하게 자리를 잡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와서 신학교수들로서 1625년 조직신학 교수가 된 Johannes Jok. Huldricus, 1642년 22세로 교회사 교수가 된 Johannes Hein. Hottinger, 1649년 히브리어와 요리문답 교수가 된 Caspar Suicer, 1651년에 논리학 교수가 된 Johannes Wirtz, 1661년 윤리학 교수가 된 Caspar Heidegger 등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Wittenberg와 같이 Genf나 Zürich의 경우에도 성경주석이 교육의 시작이요 모든 것이었다. 이런 훈련의 예가 소위 예언회(Prophezei)라는 모임의 경우이다.

바젤에서는 맨 먼저 J. Jak. Grynaeus(1540-1617)는 바젤의 루터주의자인 Antistes Simon Sulzer(1508-85)의 제자였고 튜빙겐의 유명한 루터주의 신학자들(Andreae, Heerbrand, Schnef) 밑에서 공부하였으나, 70년대에 교회교부들의 독자적 연구들에 의해서 개혁주의로 옮겼던 자인데, 이로 인하여 화해가 없이 열렬한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미움을 받게 되었던 인물이다. 1575년 이래 바젤의 구약교수였으나, 아마 역시 그로 인하여 하이델베르그로 옮기게 되었으며, Sulzer 사망이후 그의 후계자로 1586년에 다시 바젤로 돌아와 구약으로부터 바꾸어 신약교수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바젤을 칼빈주의적인 사상으로 바꾸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가 1534년 바젤고백을 칼빈주의적으로 1589년에 재해석하여 출판함으로 반루터주의적인 성격으로 바꾸게 하였고 1598년에는 모든 목사가 그 바젤고백을 의무화하도록 하였다. 그의 제자로서 그의 사위로서 후에 유명하게 된 자가 Amandus Polanus(1561-1610)이다. 이미 Gymnasium in Breslau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서 친밀하게 되었고 튜빙겐 대학에의 연구 초부터 루터주의적인 성만찬론에 대한 반대자로서 동시에 개혁주의 예정론의 신봉자로서 증거되고 있다. 바젤, 제네바,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그렇게 Polanus는 베자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 드렸던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비록 멜랑히톤의 소요학파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받아들였을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근원적으로 비판한 Ramus의 논리를 일부 받아 드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J.J.Grynaeus의 영향하에 1590년 바젤에서 학위를 마쳤고 그 후 9년 후에 Johannes Brandmüller(1533-1596)의 후계자로 구약교수로 자리를 얻게 되어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Piscator, Olevianus, Beza의 제자로서 Basel의 교수가 된 사람은 Johnnes Buxdorf(? -1629)이다. 1590년 이래 히브리어 교수이었는데, 영감에 대한 그의 독립적인 입장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진보적인 Saumur 대학의 Ludwig Cappellus의 영감론과 갈등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 Johnnes Buxdorf가 같은 대학에서 1630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 1647년에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고 1659년 아버지를 계승하여 구약교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