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그니칼럼】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
【종그니칼럼】길가에 버려진 반려동물.
내가 철부지였을 때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모두 내 중심이었다. 당돌하게도 나는 우주와 모든 천지 만물이 내가 있기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없는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옛날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듯, 어렸을 때의 내 중심의 도그마가 여지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내 중심의 사고가 허물어지게 된 것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고, 내 중심의 사고(思考)가 하나님을 만나 철이 들어,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을 머리로 하고 있는가? 가슴으로 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머리로 믿는 신앙이 있고, 가슴으로 온 몸으로 믿는 신앙이 있다. 머리로만 아는 신앙은, 지식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지 살아 있는 믿음이라 할수 없다. 머리로 아는 신앙으로는, 내 삶의 근본적인 변화나, 인생의 대 전환이 일어날리 가 없다.
당신은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혼으로 만나 보았는가? 이 땅에 태어나서 부모와의 만남, 형제간의 만남, 친구와 이웃과의 만남 등 수많은 만남이 있지만, 그러나 일생 일대의 가장 큰 만남, 내 인생의 근본을 다시 재정립 시키는 뿌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만남에서 부터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인간의 근본을 알게 되기 때문에, 다윗은 "너는 힘써 하나님을 알라!" 하였고,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갈파하였다. 그러나 깨달음이 더뎠던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아니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된 후에야, 영적으로 조금씩 익어가면서, 영안이 열려지게 되고,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안목이 전도(顚倒)되고, 그리고 내 심령속에 날 위해 피흘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삶의 진수가 보이기 시작 하면서, 꼭 찾아야 할 참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공자가 '진리에 목말라' 고백한, "조문도 석사가의(朝問道 夕死可矣)"란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 이제 팔십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아니 이제 육안마저 어두워져 말할 때에도 버벅거리고, 운전할때도 길치가 되어, 긴가 민가 헷갈려 이제 늙어 눈을 감을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창조주 하나님을 가슴으로 혼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육십대 때만 해도 눈 아래 보이던 것들이, 이제 모두 들고 일어나, 그 높이를 알수 없는 태산처럼 내 앞에 서 있다. 이젠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해서, 걸핏하면 마누라로부터 핀잔을 듣게 된다. 이 나이가 되니, 육신으로 사는 세상 안목은 점점 어두워져, 때론 내 정신을 딴데 두고 다닐 때도 있다. 내가 이처럼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할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보여, 순종의 종이 되었을 때엔, 정작 세상 물정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있다. 누군가가 "돈을 받고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초월하여 일하면 소명이다."라고 말하지만, 돈을 떠나 하늘이 준 달란트로, 그 분야의 제일인자가 되어, 그 안목을 가지고 인간사회에 보탬을 주면, 그게 바로 천직이고 소명이다. Kbs방송에서 가끔 '동행'이라는 프로를 보게 되는데, 나는 가끔 이 영상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대개 결손 가정이나, 음지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가정의 실상을 사회에 비춰주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풍요속에서, 그 풍요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절대 빈곤층을 조명해 주므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이들에게, 이웃 사랑을 일깨워 주고 있음에도, 우리는 마음이 무뎌서 육신의 귀로만 듣고, 사랑의 귀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결손 가정도 있고, 자력으로 살려는 의지보다, 기대어서만 살려는 의존적인 가정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홀로서기를 할수 있는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어느 때부턴가 자립 즉 홀로서기보다, 서양 선진국의 사회주의의 병폐인, 각종 명목의 생계비 내지 지원금 등에 의존하려는 심리가 아주 농후해졌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서 코로나에 걸렸다가 낫기만 해도, 나라에서 일십만원씩 지급해 주었으니, 그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모두 국민들의 땀방울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제 살을 갉아 먹는 것인데도, 기를쓰고 몽니를 부린다. 이 나라의 복지 정책이, 국민들의 어려움을 다 들어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홀로서기가 힘들때 붙들어 주고, 스스로 자립할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나라에 의존적이 되면, 그래서 여기에 익숙해지게 되면, 경제적 성장은 멀어지고, 재 생산 재 투자에 쏟아야 할 국가 재정이 파탄 나게 되면, 결국 나라는 재기불능이 되고 말 것은 자명하다.
이 땅에 공짜는 없다. 사람은 의존한만큼 그에 상응한 댓가를 지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칭찬에 익숙해지면, 비난에 마음이 멍들게 되듯, 대접받는 것에 익숙하게 되면, 홀대에 마음이 상할수 있다. 문제는 받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마음이다. 바로 이것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병폐다. 십수년 전 나는 중국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그들은 "일의 완성에는 관심없고, 그 천금같은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전에 무의탁 양로원을 지으면서 일꾼을 날일로 시킨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의 진척에는 관심 없고 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땅에는 완벽한 제도는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연히 개인주의 내지 이기주의에 함몰되기 쉽고, 사회주의는 자립적이기 보다, 국가나 사회에 더 의존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는, 피상적이거나 인기영합에 빠져서는 안되고, 자립정신 즉 스스로 일어서려는 독립심을 키워주어야 할 것이다.내 힘으로 하기힘든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자력으로 가기 힘든 곳에 이를 수 없을 것은 자명 하다. 나를 넘어서야, 미완(未完)의 것을 해낼수 있고, 나를 이겨내야, 비로소 그 경지에 이를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에서 할만큼 했다고 할것이 뭐가 있을까? 열심히 할수록 할일은 더 많아지고, 부족 투성이고 만족이란 없다. 나는 모든 일에 "이만하면 됐다."고 할 만한게 없다. 이것이 끝없는 인간의 욕구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 주관이지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지는 한계가 없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지옥은 거기에 있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 또한 가까이 있는 사람 사랑하면 된다. 알고보면 지옥과 천당 모두 다 내 맘 속에서 비롯된다. 상처를 받을 것인지 줄 것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상대방의 행동은 혹 불가항력일때도 있지만, 이에대한 반응은 언제나 내 몫이다.
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의 그림자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해산의 아픔을 겪어야 새 생명이 태어 나듯, 칠흙같은 어둠이 지나야 새벽이 오듯, 모든 것이 때가 있어서, 인고의 세월을 지나고 나면, 삶의 진수를 깨닫게 된다. 나는 오늘 봄을 심으려고, 고추와 참외 밭을 일구었다. 얼마 후면 주렁 주렁열릴 참외와, 풋풋한 풋고추를 상상하며,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텃밭을 일구었다. 몸이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아도, 운동삼아 한구덩이 파고 쉬고 그래도 해질무렵 헤어 보니 맘이 뿌듯하다. 벌써 차거운 땅을 헤집고 잡초들이 온 밭에 파랗게 올라오고 있다. 마음의 밭도 갈아 엎지 않으면, 잡생각만 무성해지듯, 마음의 밭에 무엇을 심느냐가 중요하다. 욕심을 심으면 욕심이 자랄 것이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 자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 성경은 "성령의 보습으로 네 마음 밭을 갈아 엎으라" 하였다. 겸손에서 사랑과 지혜가 나오고, 나를 내세우는데서 교만과 어리석음이 자란다.
종그니가
【종그니칼럼】길가에 버려진 반려동물.
얼마전에 반려견 초롱이가 한 밤중에 죽자, 마치 어린 자식을 잃은 것처럼 맘이 짠 했었다. 십여년동안 한사코 내 곁을 떠나길 싫어해서, 밤에 잘때에도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자던 애라, 더 애틋하게 정이 갔었는데, 뱃속에 주먹만한 혹이 있어서, 항상 맘이 무거웠던중에, 한밤중에 일어나 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때의 심경은 반려견이 아니라 내 피붙이를 잃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었다. 새벽예배 때나 주일예배때면, 예배의 시작과 마침을 알았던 초롱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하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지금도 가슴이 멍먹하다.
삶을 같이하는 이웃이 어찌 사람뿐이랴! 그래서 반려견이라했는가!
죽어 땅에 묻은지 수주가 지난 지금도, 어디선가 불현 달려와, 품에 안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런 내맘을 지례짐작하고, 서울 처량리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남 정은 목사님이, 걷기도 하고 짖기도 하는 반려견 인형을 선물을 해 주셨는데, 그게 여간 귀염둥이가 아니다. 두 손바닥으로 '탁'치기만해도, 그 진동으로 앞으로 움직이면서 컹컴짖는 소리를 낸다. 영락없이 죽은 초롱이 새끼가 들어 온 느낌이다. 일상을 살면서 벗이 별건가! 기쁨을 함께하면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을 함께하면 슬픔이 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를 위한 그 깊은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초롱이가 묻힌지 얼마후 뒷 터밭에서 어슬렁 돌아다니는 길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초롱이를 잃은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초롱이가 먹다 남기고 간 사료를 가져다가 물과 함께 며칠째 주었더니, 마침내 오늘 그 길 고양이가 내게 다가와, 지 몸을 내 바지가랭이에 문지르며 인사를한다. 그후로 난 그의 이름을 '나비'라 부르며 나의 벗 반려동물이 되었는데, 잘 관찰해보니 아무래도 홀몸이 아닌 임신을 한 것같다. 그래서 비닐하우스 안에 나비의 집을 만들어 주고, 오늘은 사료도 새로 사왔다. 그리고 더 춥기전에 오늘은 짬을내서 터밭에 거름을 뿌리고 이랑을 만들어서 백도라지 씨앗을 뿌렸다. 도라지는 봄보다 11월에 씨를 뿌리는게 발아율이 훨씬 더 좋다해서다.
어제 도라지씨앗을 뿌리난 후인 지금은, 새벽부터 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 종일 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무척 추울 것 같은데, '나비란 놈이' 추워서 어쩌나! 내가 밭에만 나오면, 어디서 몸을 감추고 있다가, 한 달음에 달려와, 내 앞에서 반갑다고 벌렁 나딩굴며 인사를 하며 재롱을 떠는 모습에서도, 귀엽고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집이 아닌 들이나 길에서 태어나, 쓰레기통을 뒤져서 불결한 음식 쓰레기를 주어 먹으며 살고 있는 들 고양이들! 그리고 인간들에 의해서 길가에 버려진, 갈 곳을 잃은 들개들을 사회가 힘을 모아, "불임수술을 받게 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반려동물을 기르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길러야 할텐데, 기르다가 흥미를 잃거나, 아님 기르기가 조금 버거우면. 길가에 버리는 예들이 허다하다. 한적한 길위에, 고속도로 휴게실에, 아니면 산에, 그도 아니면 바다 건너 섬에 버린단다.
분명 외모는 인간의 탈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의 양심을 버린 인면수심의 인생들이, 길바닥에 버려진 동물들보다 훨씬 더 많다. 이들을 향하여 오죽하면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했을까! 하긴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도 버리는 세상인데, 무슨 짓인들 못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누구도 돌아 보는 이 없는 길 고양이가, 한파가 몰아치는 이 한겨울에 새끼를 낳게되면 어쩌나,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은 존엄하고 경이로운 것이니 말이다. 온 종일 궂은 비가 내리는 오늘 밤도 너무 추울 것같아, 맘이 콩닥 콩닥 조바심이 몰려 온다.
우리 요양원 앞에 있는 화단엔, 겨울 한철만 빼고 꽃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저절로 된 것은 없다.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잡초를 뽑아주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이 땅에 살면서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과 동식물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우리는 자연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수 없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얼마나 큰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자연과 친숙해질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허기질때 음식으로 배를 채울줄은 알면서도, 대자연을 통하여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줄은 모른다.
종그니가